과거는 사라지는가?

by 박은아

과거는 사라지는가?


어린 시절, 아버지가 먼 출장길을 떠나 돌아오시던 날들의 기억은 아직도 내 마음속에 빛나고 있다. 그날이 언제쯤일까, 귀가 시간이 가까워질 즈음이면 우리 삼 남매는 현관문 쪽으로 시선을 빼앗긴 채 눈과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집안 공기는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고, 정작 무얼 기다리는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을 만큼 그 기다림 자체가 이미 선물과도 같았다.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실 때, 그의 손에는 종종 달콤하고 고소한 향을 머금은 호두과자가 들려 있었다. 따끈한 봉지를 열면 부드러운 카스텔라 속에 박혀 있던 호두들이 톡톡 씹히며 입안을 가득 채웠다. 그것은 단순히 과자가 아니라, 먼 길을 달려온 아버지와 함께 나누는 시간의 맛이었다. 또 어떤 날은 기름종이에 싸여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뜨거운 통닭을 들고 오시기도 했다. 그 고소한 냄새가 집안 가득 퍼지면, 우린 순식간에 모여 앉아 서로의 손가락을 닮은 닭다리를 들고 한껏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아주 특별한 날에는,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고 레스토랑에 들어가셨다. 반짝이던 샹들리에 불빛 아래에서 정갈한 접시에 담겨 나오던 함박 스테이크. 두툼한 고기를 가르자 동그랗게 퍼져 나오던 육즙과 함께 묵직한 포크와 나이프의 손맛이 어린 내 마음을 벅차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풍경과 맛이기에, 그 한 끼 식사가 남긴 인상은 오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다.

이렇듯 아버지의 귀가와 함께 따라오던 작은 음식들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다림의 끝에서 피어오르던 기쁨이었고,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 나누던 온기였으며, 그 시절 우리의 웃음소리와 이야기를 묶어주던 끈과도 같았다.

그것들은 분명 지난날의 풍경이자, 이미 저만치 흘러가 버린 시간의 조각들이다. 하지만 얼마나 아득히 먼 곳에 있었을지라도, 그 기억은 여전히 내 가슴속에서 맑고 선명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마치 오늘도 현관 앞에서 그 설렘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나는 그 시절의 향기와 온기를 고스란히 품은 채 살아간다. 그렇게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유년의 장면들을 떠올려본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고백록』(Confessiones) 제11권에서 시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기록이 있다. “시간이 무엇인지를 아무도 묻지 않으면 나는 안다. 그러나 시간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묻는다면 나는 모른다.” 이 표현은 철학사에서 시간 본질에 대한 가장 유명한 물음 중 하나로 전해진다.


아버지가 들고 오시던 호두과자와 통닭, 특별한 날의 함박 스테이크. 그것들은 물리적인 시간이 흘러 이미 저 멀리 사라진 것 같지만, 내 의식 속에서는 지금도 생생하게 타오르는 불씨다. 지나간 과거는 단순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기억 속 은밀한 자리에서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를 비추고 있다.


그 등불은 결코 과거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어린 날의 기쁨과 기다림, 그때의 공기와 웃음소리가 나를 형성하고, 내가 사랑과 그리움을 이해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결국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퇴적되어 삶의 심층을 이루며 현재를 이끄는 근원적 힘으로 살아가는 것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버지를 기다리던 어린 날의 나는, 결코 과거 속 인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와 함께 살아 있는 것이다.


며칠 전, 나는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초등학교 교문을 다시 찾았다.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그곳에 닿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내가 기억하던 웅대한 세계와는 사뭇 달랐다. 어린 시절엔 넓디넓게만 보였던 교정과 운동장이, 지금 눈앞에선 놀라울 만큼 작고 아담하게 다가왔다. 그 축소된 공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시간의 비밀을 실감했다.

첩첩산중처럼 멀게만 느껴지던 등하굣길. 한살아래의 남동생이 저만치 앞서 뛰어가면, 나는 그 작은 뒷모습을 따라 느린 걸음을 옮기곤 했다. 그 길들은 사라졌지만, 사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기억이라는 창고 속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듯 불쑥 고개를 내밀며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과거는 결코 무덤이 아니다. 그것은 ‘저장고’이다. 시간이 덮어버린 듯 보이는 기억들은 어느 날 뜻밖에, 정수리 위로 흘러내리는 햇살처럼 되살아나 우리 곁으로 돌아온다.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흐르는 강, 어제의 물결이 오늘의 등을 떠밀어 준다.”

그렇다면 과거란 단순히 지나가 버린 흑백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고 내일의 길을 열어주는 강줄기이다. 어제의 물결은 오늘이라는 땅을 적시고, 그 적신 흔적 위에서 우리는 새로운 길을 다시 걷는다. 아버지가 출장길에서 들고 오시던 호두과자가 오늘도 내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하고, 오래전에 뛰놀던 초등학교 운동장이 여전히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거는 정말 사라지는가? 아니다. 과거는 흩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의 심장 박동 속에서, 눈동자의 투명한 떨림 속에서, 그리고 지금 내가 써 내려가는 이 문장 속에서 함께 살아 있다.

결론은 분명하다. 과거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얼굴로 태어나는 존재이다. 오늘의 미소와 내일의 눈물 속에서, 어제의 기억은 다시 살아나 우리를 이끈다. 우리는 기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며, 그 기억이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축복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던 호두과자의 향기와 초등학교 운동장의 풀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살아 있듯, 나의 오늘 또한 언젠가 다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등불처럼 타오를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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