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회 영창수기 최우수작)
어디에서 근무하건 '예방'교육은 너무나 많다. 사고가 발생하면 다시 '예방'교육을 한다.
안전예방, 사고예방, 성폭력예방, 부패예방 등등등
예방교육의 대전제는 경각심이 부족했거나, 몰라서 잘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각심을 높이거나 잘 알려주면 잘못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예방교육이 좋은 점은 모든 책임을 '잘못한 사람'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제도나 담당자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기존 제도와 환경을 다시 강조하고, 규범을 잘 지키라도 다시 한 번 강조하면 끝난다. 너무도 매력적인 대책이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다.
몰라서 잘못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어떻게 하다보면 잘못할 수 있다. 인간은 그렇게 합리적이지 않다. 이익과 불이익을 비교하며 의사결정하지 않는다. 감정에 휩쓸려서, 유혹에 빠져서, 자신도 모르게, 어쩌다 잘못을 저지른다. 그들을 비난만 하면, 잘못이 발생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잘못한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을 알아야한다. '어떻게 잘못에 이르게 되었는가', '이후에 그들의 생각과 태도에는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알아야 한다.
군에서 인권업무를 하였을 때 영창에 다녀온 병사들의 수기를 공모했다. 의외로 많은 병사들이 참여했다. 1년에 거의 1000건 가까웠다. 검색해보니 '국방일보'에 실렸던 제1회 최우수작이 있었다. 2014년 경험이었으니 친구도 벌써 서른 살이 되었구나. 눈동자가 빛나던 친구였는데.
//kookbang.dema.mil.kr/newsWeb/20170106/1/BBSMSTR_000000010058/view.do
==============================<이하 당선작>
[2016년 제1회 영창수기 최우수작]
계급장을 달기도 전에 영창을 가게 됐다. 수료식에서 아들 얼굴만 보기를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께 수료식 면회 소식이 아니라 영창 소식을 알려드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벨 소리 끝에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들!”이라는 힘찬 한마디였다. 그 기운찬 말에 나는 머뭇거렸고, 하는 수 없이 작은 목소리로 영창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침묵이 전화선을 타고 흘렀다.
“…….”
“엄마 음식 준비하던데 어떡하냐?”
아버지의 말씀에 머릿속이 멍해지더니 코끝이 찡해지며 눈꼬리로 전해졌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군대 간 아들 하나만을 위해 6주간 하루하루를 기다리면서 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을 어머니에게 이런 소식을 들려주는 내가 너무 미웠다.
밖에서는 수료식 준비를 위한 제식훈련 소리가 들려왔다. 물끄러미 창밖 너머의 연병장을 바라봤다. ‘저곳에 있었어야 했는데.’
입창하기 전에 한 번 더 부모님과 통화할 기회가 생겼다. 모르는 번호였을 텐데 기다렸다는 듯 아버지는 전화를 받으셨다. 건강하시라는 말을 전하는데,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입술 끝에 힘을 주어 간신히 떨리는 말을 이어가고 계셨다.
“건강해라. 아프지 마라. 감기 조심해라. 힘내라.”
전화를 끊고 철창과 CCTV 그리고 헌병들 사이로 들어갔지만,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는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철창 뒤에서 잠자리에 들면서,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이렇게 잘못 끼울 수가 있는가 하는 생각에 비참했다. 계속 후회했고 그럴수록 아들 만날 생각에 음식 준비를 하다가 이런 소식을 들었을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게 영창 5일이 지나고 훈련소로 돌아가 9주간의 훈련을 마쳤다. 조금 늦었지만, 부모님과의 면회는 너무도 기다린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눈에 띄게 초췌해지셨고 어머니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나도 울음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고 능청스럽게 부모님을 껴안았다. 그리고 ‘다시는 부모님 눈에 눈물을 보이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동기들보다 늦게 훈련소를 수료하고 2014년 12월 31일 2사단 방공중대에 배치됐다. 두렵고 설?다. 부모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임들의 눈초리가 차가웠다. 영창 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임들은 언제 사고 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계하고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동기들도 선뜻 다가와 주지 않는 것 같았고, 많은 사람 속에 있지만 혼자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전우들이 싫었다.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고 화를 내는 선임들이 싫었다. 결국, 선임과 마찰이 생기고 마찰로 서로 언성을 높였고, 간부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두 번째 영창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며칠 뒤 여자친구에게서 “헤어지자”는 전화를 받았다. 영창까지 다녀오는 사람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짧은 말로 이별을 통보했다. 눈앞이 캄캄하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저녁 시간, 야외 쓰레기장 근처에 숨어 눈물을 흘렸다. 외로움과 분노를 어디에 풀어야 할지 몰랐다.
다음 날 아침, 몸을 일으키기 힘들 정도로 온몸이 아프고 뜨거웠다. 40도에 이르는 체온 탓에 입실하게 됐다. 모두가 원망스러웠다. 운이 없다고 생각했다. 병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영창 생활이 떠올랐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 통제받고 감시받는 바람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그 시간과 병상에만 누워 있는 시간이 겹쳤다. 그때 받았던 아버지 편지가 생각나 짐 속에 있던 편지를 꺼냈다. 퇴창 후, 아버지에게 처음 받은 손편지였다.
“너는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하지만 아버지 생각은 다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의 군 생활에 전환점이 되었으면 한다.”
아버지가 쓴 한 문장 한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흐느꼈던 아버지의 목소리와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어머니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퇴창 후 그토록 되뇌었던 다짐들이 되새겨졌다.
두 번째 영창을 마치고 자대로 복귀했다. 군 생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첫 목표는 특급전사였다. 목표가 생기자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자연스레 행동도 달라졌다. 특급전사가 되기 위해 체력단련실에서 선임들과 함께 운동하다 보니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풀 기회가 생겼고, 전우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일과 중 작업이나 과업이 힘들어도 가까워진 선임들과 함께하니 한결 능동적이고 긍정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 달라진 내 모습에 전우들뿐 아니라 간부님들도 좋아하셨다. ‘특급전사 되기’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여러 사람이 도움을 주고 격려해 주었다. 2015년 8월 나는 특급전사가 됐다. 그 후로도 11월 호국훈련 유공 상장, ○○대대 집체교육 우수 상장 등을 받으며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군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나는 군 생활을 제대로 시작해 보기도 전, 영창이라는 장애물과 맞서야 했다. 아버지의 짧은 손편지는, 부모님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든든한 지지자고 나는 그만큼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했다.
아버지의 손편지는 평생 보물로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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