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순간:소설, 김연수)(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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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짧게 소설의 단락을 3쪽 정도 보여준다. 발췌도 아니고 장편이건 단편이건 덜렁 3쪽만 보여준다. 내용도, 맥락도 알 수 없다. 그러면 재미없느냐. 전혀 그렇지 않다. 소설 자체가 재미있는데, 재미있는 소설의 재미있는 부분을 발췌했으니 당연히 재밌다.
나는 학력고사 시절의 사람이다. 나는 국어를 좋아했고, 국어를 잘했다. 문과는 '국어2'라는 과목이 있었다. 당시에는 조금 파격이었는데 국어2는 교과서 밖에서 시험문제가 나왔다. 수험생은 시험에 나올만한 단락을 모아놓은 두꺼운 참고서로 공부해야 했고, 학교는 두꺼운 참고서로 진도를 나갔다. 다른 친구들은 엄청나게 두꺼운 국어2 참고서를 싫어했지만, 나는 좋아했다. 진도랑 상관없이 발췌된 소설들을 여러번 읽었다. 집에 소설책은 한 권도 없었으므로 내가 접할 수 있는 문학은 그게 전부였던 때였다. 재미있어서 공부한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부분도 이런데, 소설 전체를 읽어보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했었다.
보르헤르트의 '적설' 부분이 기억에 남는다. 군대의 이야기다.
많은 남자들이 그렇듯, 군에 가서 크게 변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무가 부여되었고, 무작위로 사람을 만났다. 돌을 나르고, 삽질을 하면서, 인간은 몸이며, 모든 인간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느 새벽 참호에서 멍하니 적군방향을 바라보았다. 계획상 아침이 오기 전에 공격해올 것이었다. 동이 터오는데도 나무와 바람소리만 있었다. 잠깐 멍한 사이 안개 사이로 대항군 행렬이 갑자기 보였다. 이내 공포탄을 쏘고 함성을 지르며 올라왔다. 우리도 기관총에 공포탄을 장착하고 쏘았지만, 몇십발 없었던 탄은 곧 바닥 났다. 나는 참호에 쭈그리고 앉았다. 대항군은 소리를 지르며 내 머리 위를 뛰어넘어 고지로 올라갔다. 소설의 한 장면 같았다.
보르헤르트의 '이별없는 세대'를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