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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Nov 09. 2023

'방'에서 산다는 것과 '집'에서 산다는 것

(스물 여섯 집에 관한 기록, 아홉 번째 집)

https://blog.naver.com/pyowa/223259860961



1989년 겨울 같은 동네 반지하로 이사했다. 


반지하였지만 내가 느끼기엔 대궐같았다. 우리는 자취방에서 전세집으로 이사한 것이다. '방'에서 '집'으로 이사하는 것은 다른 세계로의 공간이동이었다.


번듯한 집이었다. 빌라촌 가장자리에 서 있는 번듯한 양옥이었다. 1층은 항해사 하시는 주인집이 살고, 2층은 비싼 전세집이 있었고, 2집이 반지하에 살았다. 우리집은 아니지만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과 길다란 화단이 보였다.


1층 주인집을 문을 오른쪽으로 돌아들어가면 반지하로 내려가는 우리집이었다. 높은 계단 5칸 정도 내려가면 샷시문이 나왔다. 샷시문을 열면 작은 부엌이 있었고, 부엌을 통해 화장실, 안방, 작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훨씬 좋은 집이었지만, 집안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다는 것이 제일 좋았다. 공용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것과 집에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것은 삶의 존엄이 달라진다. 배수 때문이었는지 화장실은 높은 계단 세 칸 정도 올라가야 했고, 천정은 많이 낮았지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볼일 보는 존엄도 상승되었지만, 씻는 존엄도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자취방에서는 부엌에서 씻었는데 부엌 창문이 없어 밖에서 부엌이 들여다 보였고, 겨울에 눈송이가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러니 샤워할 땐, 철망 창문 아래 쪼그려 앉아서 씻어야 했다. 이제는 샤워도 마음 편안히 할 수 있고, 가스비 때문에 아껴쓰긴 했지만 따뜻한 물을 쓸 수 있었다.


가스보일러가 생겼다. 부엌에 연탄이 없다는 말이다. 더 이상 연탄을 나르지 않아도 되고, 연탄가는 시간 맞추어 허겁지겁 집으로 오지 않아도 되고, 연탄구멍 조절에 신경쓸 필요도 없게 되었다. 검댕이 묻힐 일은 없었다. 화장실과 보일러만으로도 아래에서 살다가 평범한 신분으로 떠오른 느낌이었다. 수세식 화장실과 가스보일러에 비하면 대문, 창문, 큰 방 이런 건 다 사소한 일이었다.


거실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아주 작은 부엌이 있었다. 작은 부엌에 딱맞는 작은 싱크대가 있었다. 자취방에서 부엌 바닥에 놓여있던 가스레인지는 여느집처럼 싱크대에 올라와 있었다. 드디어 싱크대, 냉장고, 가스레인지가 있는 평범한 부엌이 되었다. 당시 문화대로 밥과 반찬이 올려진 상을 안방으로 나른 후에 밥을 먹었다.


반지하였지만 안방 창문은 아주 컸다. 집이 땅위로 많이 올라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창문 앞쪽 땅을 깊이 파내 창문을 크게 뽑았다. 햇살이 들어 창문이 꽤 환했다. 낮에 불을 꺼도 지낼만 했다. 창문 앞은 화단쪽이라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반지하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방도 아주 컸다. 세간살이를 놓고도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데 좁지 않았다. 장농도 하나 마련했고, 티비도 생겼다. 아마 이쯤 AM만 나왔던 고장난 카세트를 버렸던 것 같다. 전화도 설치했다. 전화비 때문에 여전히 전화는 짧아야했지만, 이제 공중전화 DDD박스에 더 이상 가지 않아도 되었다.


작은 방을 나와 남동생이 같이 썼다. 포마이커 책상 2개가 있었고, 시골 제재소에서 짜 온 책꽂이도 여전히 위에 놓여 있었다. 책상 뒤에 커다란 창문이 있어 답답하지 않았다. 대학때 기타도 치고, 대금도 불었다. 공부방이었지만, 이 방에서 공부를 한 적은 없다. 안방 전화기 전화선이 길어 대학생 땐 작은 방까지 가져와 시내전화를 하곤 했다.


이 집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도 가고, 군대를 갔다. 


1993년 2월 23일 군대가는 날이 생각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아침을 먹었다. 부모님은 반지하집에서 올라와 대문까지 배웅을 나오셨다. 나는 '다녀오겠습니다' 인사하고 내리막을 내려왔다. 지금도 그 골목길에 가면 긴장하면서 당당히 보이려했던 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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