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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길동 Apr 04. 2024

케이블카 안에서 당신과 재회할 줄이야.

(그냥 믿어주는 일, 미야모토 테루)(2/2)

https://blog.naver.com/pyowa/223405241089




돌아보니 무언가를 결심하면서 시작한 적이 없다. 우연히 해보다, 조금씩 더하다 재미를 붙였고, 무언가 될 것 같아 계속했을 뿐이다. 나의 글쓰기도 그렇다. 36살 너무도 한가해졌다. 처음 책을 읽었다. 읽으니 조금씩 쓰고 싶어졌다. 거기에 아무런 계기도, 어떠한 결심도 없었다. 쓰는 순간이 즐거웠을 뿐이다. 


미야모토 테루는 비오는 날 우산이 없어 지하상가에 비를 피했다. 서점에서 짧은 단편소설을 읽었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때 별안간 결심했다. '나라면, 더 재미있는 소설을 써보일 수 있어.'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 소설가가 되었다. 1975년 미야모토 테루 28살 때였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쿄 신주쿠 진구구장에서 야구를 보다가 1회말 한 타자가 볼을 때리는 순간 '그렇지, 소설을 써보자'고 결심했다. 그날로 원고용지 한 뭉치와 1,000엔 정도의 세일러 만년필을 샀다. 재즈클럽영업이 끝나면 돌아와 부엌 탁자에서 소설을 썼다. 1978년 봄 하루키 29살 때였다. 


미야모토 테루는 2년 후인 30살에 다자이오사무상을 수상했고,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 해 가을 문예지 군조 신인상을 수상했다.


그들의 기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기백은 확신에서 온다는데, 그렇다면 확신은 어디서 오는 걸까. 미야모토 테루도 무라카미 하루키도 별안간 결심한 것이지만 생각마저 별안간은 아니겠지. '끝까지 노력할 수 있을까', '재능이 있기는 한걸까', '그때까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라는 주저함이 꽉 찬 시간이 있었겠지. 어느날의 소낙비와 어느날 야구배트 소리에 주저함이 확신으로 바뀐 것이겠지. 그때서야 '별안간'이 등장한 것이다.


어릴 적 그림에 이야기가 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림은 한 장면인데 어떻게 이야기가 있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안다. 이야기가 동영상일 필요는 없으며, 동영상일 수도 없다. 이야기는 몇 개의 장면이다. 몇 개의 장면을 한 그림에 넣거나, 한 장면으로 몇 개의 앞 뒤 장면을 떠올리게 하면 된다. 


문장도 하나의 장면을 향해 나간다. 하나의 장면이 완성되기 위해 여러 장면이 앞 뒤로 배치된다. 그 자리마다 필요한 문장이 있다. 우리 삶도 그렇다. 하나의 장면을 구성하는 여러 순간으로 구성된다. 장면을 위한 문장과 순간을 위한 문장으로 이야기는 꾸려진다.


미야모토 테루는 한 그루 단풍나무가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면서 금수錦繡(수를 놓은 화려한 비단)라는단어를 떠올렸다. 삶도 저 단풍나무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한 문장이 맥락없이 떠올랐고 그 장면으로  '금수'를 써냈다. 


케이블카 안에서 설마 당신과 재회할 줄이야,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금수, 미야모토 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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