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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없었다면, 책이 없었다면, 예술이 없었다면, 다른 세계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의 즐거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 기쁨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글을 읽어나가며, 글을 써보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진정한 문장은 흔들리는 마음, 한가닥 바람, 떨어지는 햇살을 그려내는 것이다.
풍경은 기억이다. 풍경은 내가 보는 것이므로, 내가 움직이면 풍경은 변한다. 풍경은 나로 인해 존재하고, 풍경의 생명력은 내가 부여한다. 기억은 지나갔지만 언제나 불확정이다. 구름이 모양을 끊임없이 바꾸어나가듯,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 작은 조각을 글로 잡아채 종이에 적을 뿐이다.
거리를 걸으며, 가끔은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 생각해본다. 내 소설 속에 인물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거리에는 여러 개의 소설들이 중첩되어 진행되고 있다는 상상을 한다. 삶에 나른한 순간 하나가 없다. 나비가 살랑 날아가는 순간도, 꽃가루가 이러저리 흩날리는 시간도 소설가의 정확한 배치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미치면, 살짝 흥분된다.
모든 감각은 순간이다. 순간은 감각으로 남는다. 순간이 지나면 겨우 몇 가지 선과 색만 남아 나머지는 내가 채울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채우는 부분은 점점 늘어난다. 나에게 강렬했던 부분은 구체화되고, 나머지 부분은 지워져 간다.
첫사랑은 설레임과 불안함이다. 성공도 실패도 겪어 보지 않았으므로 이후를 상상할 수 없다. 완숙한 여인이 덫을 놓으면 청년은 여인의 신호에 반응하며 빠져든다. 청년의 머릿속은 여인의 스틸컷으로 가득채워진다. 여인은 달아날 듯 맴돈다. 설레임과 불안함 속에 청년은 포로가 된다. 사랑하는데 이유는 없다. 알면서도 헤어나올 수 없고, 가야하지만 주저하게 된다. 사랑은 작은 빛의 띠를 통과하듯 지나간다. 사랑하면, 지나가는 그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사랑은 순간이다.
사랑이 시작될 땐 닿을 듯 말듯 걷는다. 감각이 예민해진다. 전해지는 사소한 신호도 감지할 수 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면, 팔등을 스치는 머릿결 한올 한올이 느껴진다. 전해지는 향기가, 샴푸의 냄새인지, 연인의 향기인지 알 수 없었다.
하나 둘씩 알아갈수록 궁금한 것은 줄어들고, 사랑도 작아졌다. 감각의 예민함도 지쳐 무뎌졌다. 사랑은 그렇게 식곤했다. 사랑하고자 하는 욕망마저 사라진다. 초심자의 사랑은 허망하게 끝났다. 이제 그는 어떤 사랑이건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남자가 되었다.
헤어진 연인은 다시 만나지 않아야 한다. 그녀가 나를 떠났든, 내가 떠나왔든,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한다. 살면서 무심코 돌아보게 될 때가 있다. 그 순간에 둘이 주인공이지만, 그 시간속에서는 허둥지둥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불완전하고 미숙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서로 용서하고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나의 연인들은 내 기억속에서 변해가고 있다. 앞으로도 잊혀지며 변해갈 것이다. 나도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바래지며 잊혀갈 것이다.
고통은 관성과 타성을 벗어나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의 의미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