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장을 입은 남자
그들은 그들에게 당연한 옷을 입고 그 옷에 맞게 움직인다
친정 집에는 남자가 둘 있다. 이발사인 아빠, 운동선수인 오빠가 있다. 아빠는 항상 이발할 때 머리카락이 잘 떨어지는 보들보들한 소재의 (등산복 같은) 티셔츠를 자주 입었고 오빠는 면티와 운동복 바지를 입는다. 그 둘과 그리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 모습을 이십 년 넘게 한집에 살면서 보니까 익숙해졌다. 한들한들한 옷을 입고 팔을 들고 누군가의 머리를 손질하는 아빠의 모습이나, 꽤 큰 가방에 보충제와 이것저것 옷 같은걸 넣고 어디론가 나가는 오빠의 모습은 정말로 당장에라도 그릴 수 있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을 정도로 기억에 박혀있다. (그 버전 역시 몇 가지 없다. 가령 반바지가 긴바지로, 반팔이 나시 운동복으로 바뀌는 정도.)
그래서인지 나는 글을 쓰거나 혹은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을 때 남자들이 정장을 입은 모습을 보면 눈을 떼지 못한다. 그 양복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갈 때 가끔 옷장에서 꺼내 입은 것이 아닌 생활이 양복인 것처럼 그 양복이 찰떡같이 어울리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 관경이 어쩐지 신기하게 다가왔다.
‘저렇게 양복이 교복처럼 잘 어울리기도 하는구나.’
그들을 지켜보면 악수할 때의 손짓이라던지, 걸음걸이. 모두 정장스러웠다. 손끝에도 말끝에도 힘이 있었다. 몸매가 좋은 것과는 또 다른 게 배가 나와도 그것대로 벨트를 한 배조차 잘 어울렸다. 요즘 새로 생긴 커피숍에 정장 입은 사람들이 자주 왔다. 그래서 글을 쓰다 말고 그들을 관찰했는데 그게 어떤 뉴스 기사보다 재밌었다.
아빠는 이발을 끝내고 손님이 가시면 항상 소파에 앉아서 그 하얗고 보드라운 손으로 리모컨을 만진다. 채널은 착착 돌아가고 원하는 채널이 되면 그 리모컨을 또 살포시 나둔다. 그 모든 게 참 아빠 같다. 느린 속도. 입은 옷처럼 품이 넉넉한 여유. 아빠는 살포시 걷고 살포시 나둔다.
최근 들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과 만났다. 글을 쓰는 사람도 있었고 사업체를 몇 개나 하는 사람도 있었다. 공무원도 있었고 조그맣게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그들대로 살고 있었다. 그들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당연해 보이는 그런 옷을 입고.
‘나는 어떤 방향으로 어떤 옷을 입고 살고 싶은 걸까.’
내가 하고 싶은걸 한번 온전히 적어보았다. 이런 것들은 매일 하고 살면 좋겠다 싶은 것, 가끔씩이라고 했으면 좋겠다고 느낀 행동들. 사람들에게는 어떤 걸 주고 싶은지. 등등
적을수록, 그리고 사람들을 만날수록 분명해졌다. 모두 막연히 부자를 꿈꾸지만, 나도 물론 부자를 꿈꿨지만 그걸 적고 나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매일 기도와 자아성찰을 할 시간. 자주 꽃을 살 수는 있어야 하고 그 꽃병에 물을 새로 갈아줄 여유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래도 집 베란다에 화초를 키우는 것보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좋다. 다른 모습의 사람들을 보면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통해 글을 쓰는 게 좋다. 티브이를 보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편이 좋다.
이런 생각을 한적은 처음이었는데 어쩐지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를 보는 것은 신기한 일이기는 했지만 내가 원하는 쪽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도 덤으로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