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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필영 Nov 15. 2019

가방 안에는 팬티가 있었다.

실패해도 괜찮다.


준비했던 공모전에서 떨어졌다.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응모작이 50개밖에 없었던걸 확인한 뒤 더 힘이 빠졌다.

출판업에 관련된 아이디어 기획안이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기획안을 몇 번이나 수정했다. 정말 막노동이었다.

한 달 동안 꼬박 준비하고 마감일이 3일 남은 시점에 거제도에 가족끼리 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바람을 쐬며 머리를 식히고 최종 정리를 해서 그 기획안을 넣을 생각이었다.

친정엄마 아빠, 그리고 남편과 아이와 함께 간 거제도의 여름은 더웠지만 바다색과 하늘색이 예뻤다.

쪼르르 다섯이 앉아서 배를 기다리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은 생각보다 나를 행복하게 했다.

아이들의 비상약을 챙겨 왔지만 먹을 일은 없었고 밤바다까지 알차게 보고 왔다.

바다라는 것은 정말로 시간대별로 색깔이 다르고 느낌이 달랐다. 여성스러운 거제도의 바다는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힐링의 시간을 끝낸 것과는 별개로 마지막까지도 나는 소화를 잘 시키지 못했다.

이 공모전을 준비하며 나는 뭘 먹기만 하면 체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죽만 먹으면서 준비를 했다.

 '사서 고생을 하는구나. 이걸 끝으로 절 때 이런 일을 벌이지는 말아야지.' 하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준비했던 공모전이었다. 당선작에 내 휴대폰 번호의 끝자리가 없었다. 나는 왜 그렇게 열심히 했던 걸까.

앞의 실패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맞아. 나는 공무원 시험 준비도 하다가 중간에 그만뒀지. 그리고 휴대폰 가게도 몇 년 하다가 접었어. 끝까지 할 거라고 설치던 아파트 팔던 일도 몇 개월 판매가 없자 그만뒀어. 다시 폰 가게로 갔었잖아.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10년이나 보냈어. 나란 사람은 이렇게 뭘 계속해서 실패만 하는 존재인가 봐.'

아주 적나라하게 스스로가 미워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아무것도 아닌 시절은 그 10년뿐만이 아니라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심지어 초등학교 때도 그랬다.

강단에서 상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고 반장을 한적도 없었다. 그냥  배터리가 56프로쯤 채워진 휴대폰처럼 어느 정도의 에너지로 학교를 다니는 평범한 아이였던 것이다. 평균이 80점을 넘지 못하고 국어를 잘하지만 90점을 넘지는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1년에 한 번 바뀌었던 선생님들 중에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나마 학자금 지원을 받았던 고3 때 담임선생님이 가난한 아이로라도 기억해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학창 시절이 스치듯이 지나갔다. 그러면서 나의 별 볼 일 없음을 느끼고 있을 때 고등학교 때의 어느 하루가 떠올랐다.

생리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피가 조금밖에 안 나와서 아침을 먹고 교복을 서둘러 입으며 엄마에게 가방에 팬티라이너 좀 넣어달라고 말했다. 2교시쯤 끝나고 팬티라이너를 갈러 가려고 가방의 앞지퍼를 여는 순간 당황했다. 엄마는 잘못 들었는지 팬티 3장을 넣어둔 것이다.

아무 말 없이 내 가방에 팬티를 3개 넣었을 엄마의 손이 떠올랐다.

엄마의 방식으로 묶어놓은 그 비닐 속의 팬티를 떠올리자 힘이 났다.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는 이유가 100개 있어도 괜찮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아마도 공모전보다 그것을 핑계 삼아 떠났던 친정엄마와의 거제도 여행이 더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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