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부모님이 하고 있던 이발소를 중간에 두고 미진 슈퍼와 금성 슈퍼가 있었다.
미진 슈퍼는 이발소에서 30초 거리라 가까웠지만 차가 다니는 도로를 건너야 했다. 도로라고 해도 후다닥 건널 수 있는 아주 좁은 도로였지만 아무튼 그쪽 길에는 차가 다녔고 금성 슈퍼 쪽은 2분 거리였지만 차가 비교적 없는 골목길이었다.
미진 슈퍼 아줌마는 내가 가게에 들어서면 인사를 건너뛰고 "뭐 사러 왔는가베." 하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맞이해주었다. 그걸 들으면 나도 모르게 "네 안녕하세요!" 큰 목소리로 물건을 씩씩하게 집어 들고 계산대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반대편 금성 슈퍼 쪽은 약간 할머니스러운 아줌마가 앉아있었는데 살려면 사고 그냥 둘러보셔요 포즈로 앉아 계셨다. 그러다가 내가 물건을 집으면 그제야 "그거 하려고..?" 하며 무릎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해주었다. 그때 나는 그 할머니와 아줌마가 애매한 그 아주머니가 곱고 고운 새색시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나 역시 항상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고 인사를 했고 목소리도 작고 차분하게 나왔다.
그 두 슈퍼를 그렇게 골고루 다니며 물건을 샀다. 7살부터는 엄마의 심부름으로 두부를 살 때는 금성 슈퍼를 갔고, 우유를 살 때는 미진 슈퍼를 갔다. 이발소를 하던 우리 엄마는 그 두 집의 평판을 얻기 위해 내게 가능한 골고루 사 올 것을 분배해주었다. 오늘 금성 슈퍼를 갔으면 내일은 미진 슈퍼를 가라는 식이었다.
나는 너무 공손하게 인사했던 금성 슈퍼에서의 모습이 그다지 실제의 내 모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미진 슈퍼에서의 밝음 역시 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딘가에서 온 것처럼 내게 아주 자연스러운 타인과의 목소리를 맞추는 일 정도였다. 그 어디에도 사실 내 목소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게 싫거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기력에 대해 글을 쓰다가 수업이나 클럽활동의 조장 역할을 하기 위해 목소리를 올릴 때면 그 슈퍼 둘이 떠오른다. 오늘의 슈퍼는 어느 곳이고 내가 내야 할 목소리는 어떤 목소리인가. 미리 그런 컨셉을 정하지 않는다. 미진 슈퍼 아줌마의 목소리, 그리고 금성 슈퍼의 앉아있는 아주머니의 무릎만 봐도 나는 그곳에 맞는 톤의 목소리가 나온다.
누군가는 내게 밝다고 하고 누군가는 내게 어둡다고 한다. 누군가는 내가 밝아서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내가 적당히 어두워서 좋다고 한다. 누군가는 글이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강의가 좋다고 한다. 무기력에 대해 쓰는 사람이 이렇게 밝냐고도 하고 글이 진짜인지 말하는 모습이 진짜인지 묻기도 한다. 하나가 진짜면 하나가 가짜가 되는 건가. 그저 슈퍼를 들어가는 마음으로 그 공간에서 목소리를 냈을 뿐이다.
내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준은 밝고 어둠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내 안에 있는 마음의 단면이다. 단지 나는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가지고 있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확실히 아니다. 내게만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정도의 사람은 감자칩 정도만 먹으면 가벼워진다. 물론 그 감자칩을 살 때 어떤 슈퍼로 갈 것인가. 그때 목소리는 각각 다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