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이틀 째. 주섬주섬 캡모자를 쓰려다가, 오늘은 밀짚모자를 썼다. 어제 캡모자를 쓰고 나갔었는데 볼이 너무 뜨거웠다. 그리고 500ml 물도 한통 챙겼다. 나가려는데 남편이 야간 끝나고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 집으로 왔다.
“여보 갈 거예요? 저도 그럼 운동하고 와서 잘게요.”
그래서 오늘도 함께. 신기하다. 어제보다 훨씬 더 몸이 가벼웠다. 중간중간 꽃도보이고 나무도 보였다. 어제는 너무 힘들어 세세히 보지 못한 풍경이 들어왔다. 그러나 역시나 어제보다 10미터쯤 더 갔을까. 다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도 산책로를 모두 돌지는 못하고 집으로 다시 돌려서 돌아왔다. 남편과 나는 덥다 덥다를 외쳤지만 그래도 함께 산책을 하면서 대략 102번 정도는 웃으며 대화한 것 같다. 이토록 좋은 운동이라니.
걸어서 다시 돌아오는 길, 남편이 오르막이라 운동을 해야 한다며 빠르게 올라갔고나만 홀로 천천히 올라갈 때 갑자기 예전에 휴대폰가게 할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 나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가게가 잘 되지 않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답답한 마음에 전화로 점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지만 (철학은 본 적 있으나 이후 신점은 본 적이 없다) 그때는 분기별로 전화로 점사를 보고는 했었다. 대구에서 아주 유명한 역술인이었던 여성분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이거였다.
“본인을 조상님들이 엄청 아끼세요. 그래서 23살의 나이에는 스파르타이긴 한데, 인간세상 경험 많이 하라고 지금 휴대폰가게 창업까지 하게 한 거예요. 가게가 잘 안 되는 건 당연해요. 그 가게는 단순히 경험용이거든요. 핑퐁처럼 조상님들이 필영 씨를 이 상황에도 처하게 하고 저 상황에도 처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도 남들은 빚내서 경험하는데 필영 씨는 가게 하면서 빚은 아직 없죠?”
“아, 네...”
그분 말씀대로 가게가 잘 안 된 건 사실이었지만 가게를 그만둘 때 당시 빚이 있지는 않았다. 그냥 빈손으로 나왔다.
가게가 망하고 난 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때의 나는 온라인에 대해 너무 무지했었고 가게에 앉아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이 너무나 많았다. 모든 것들을 활용하기에는 무지했었다. 그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13년 전인가. 그때에도 블로그가 있었고 블로그 홍보가 있었고 온라인으로 결제를 받는 무수한 업종이 있었다.
당시 재회 사이트였던 지금의 자청이 만들었던 '차머스' 칼럼을 뺀질나게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어떤 원리로 그렇게 주문이 많아지고 사람들이 쉽게 결제를 하는지를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거다. 그러니까 소비자로만 내가 존재했던 것이다. 아마도 지금이라면 소비자의 입장에서 재밌어할 영상을 휴대폰가게에서 엄청 찍었을 텐데 말이다. 가게 구조도 조금 더 손님이 편하게 바꿨을 거고, 나라는 사람도 많이 노출을 했을 거고, 여러 가지로 가게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가게를 차리기 전에 그 가게 근처 인구 밀집 시간대 조사라던지 주로 오는 나이대 사람들 이런 것도 당연히 조사했을 것이다. 그렇다. 몇 천만 원이 들어간 게임인데 감으로 가게를 결정할 수는 없는데. 나는 그렇게 한 것이다.
이벤트도 많이 열었을 것이고, 그때 일일이 기록했던 손님 한 명 한 명의 특성들을 (예를 들어 팔을 다치고 오심. 빵을 좋아하심.) 그땐 그냥 내가 그 사람이 좋아서 다음번에 왔을 때 기억하기 위해 메모를 해두었었는데, 좀 더 그런 것들을 활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새로 나온 휴대폰을 홍보하는 일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는데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은 그들에게 오히려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의 뉴스레터발행 같은)
그래서 누군가 내게 너무 쉽게, 우리 동네에는 커피숍이 많아서, 고깃집이 많아서 그걸 차리려고 해 라던지, 우리 동네에는 사람이 많아서 뭔가를 차리려고 해. 아무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웃음이 난다. 그들이 그 뒤 수많은 조사와 분석을 통해 그런 결론을 내렸더라면 응원하겠지만 대개 그냥 사람이 많으니까에서 이야기는 끝났다. 물론 그들이, 나처럼 망하지 않고 잘 될 수 있지만 사실은 그게 더 좋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산책로 반을 다시 돌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러니까 산책길 코스가 아닌 그냥 아파트가 즐비한 길을 걸을 때 남편이 물을 주었다. 나는 물을 마시고 다시 힘을 내서 집 근처로 걸었다. 집에 와서 씻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너무 망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망하면 진짜 많이 배우는데.
깨끗이 씻고 책상으로 왔다.
한번 망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뭐부터 망하면 좋을까. 그래. 망하는 것은 어감이 좋지 못하니 실패하는 걸로 하자. 뭐부터 실패하면 좋을까.
리나작가님과 함께 하는 글로성장연구소를 나의 실험으로 실패시키면 안 되니 (그렇게 놔두시지도 않겠지만) 내 걸로 실패해 보자. 내가 가진 가장 하찮은 걸로 해볼까.
그러자 아빠 이름으로 만든 내 유튜브가 생각났다. 아, 좋다. 유튜브를 한 5번만 망해볼까.
내가 생각하는 망하는 것의 정의를 먼저 정하자.
1년 내내 일주일에 한 편씩 찍어 올리는 노동력을 투자한다.
1년 동안 구독자가 100명이 넘지 않는다.
영상에 댓글이 없고 조회수가 영상마다 전부 100이 넘지 않는다.
영상이 시간이 지날수록 발전이 없다. 조회수가 점점 떨어진다.
이 정도로 정하면 망한 채널이 되겠지. 그런데 아빠이름으로 망하면 안 되니까, 내 이름으로 다시 유튜브를 만들자. 또한 이 채널에 구독자가 이미 60명이 넘기에 금방 100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럼 망하지 못한 게 되므로 새 채널을 만들자. 채널 이름을 만들자. 어차피 5번 망할 거니까 채널 이름은 아주 흔하고 촌스러운 걸로 해보자.
김필영의 글쓰기 교실, 필영생각노트, 글 쓰게? 글싸개? 00 하는 00 작가, 직업이 작가, 김필영 TV, 필영감
요기서 골라서 하자.
그리고 로고를 대충 캠바에서 30분 만에 만들고 새로운 유튜브 채널을 오늘 만들자. 그리고 10분짜리 영상을 세바시 촬영 때처럼 몰아서 하루 만에 다 찍고 나눠서 업로드하면 되겠네. 주제는 글쓰기로 하자. 그게 준비를 덜해도 되니까.
5번 정도 망하면서 깨우친 걸로 아이들이 유튜브에 도전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가르쳐줘야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때쯤 아이들도 개인채널을 운영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
유튜브를 망하고 나면 분명히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아, 실패하고 나면 말이다. 그럼 나는 이번에도 빚도 없이 또 새로운 깨우침을 얻을 수 있다. 정말 운동을 시작하니 평소 내가 보던 세상이 달라 보인다.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방금 이 생각을 하다 말고 다시 화장실로 가서 똥도 엄청 많이 쌌다. 그러니까, 운동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그리고 쓰다 보니 유튜브가 아닌 우선적으로 이 글을 먼저 실패한 것 같다. 글이 두서가 없고 엉망진창이지만 운동일지라는 명목하에 업로드는 해볼까 한다.
<오늘의 할 일>
1. 지금 이 글 업로드 2. 집 치우기 3. 남편과 병원 가기 4. 아이들 하원 5. 아이들과 놀기 6. 저녁 함께 먹기 7. 애들 잠들면 유튜브 로고 만들고 채널 앞에 붙이기 (배너는 일단 생략) 8. 독서 9. 꿈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