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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년처럼 연애한 덕분에

by 김필영



연애는 하나의 세계와 다른 세계가 만나는 일이다. 내가 알던 세상이 반쪽짜리 세상이라는 걸 깨닫게 되고 타인의 인생에 깊게 들어가면서 와,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고? 이렇게 자라온 사람도 있다고? 놀라워하면서 내 세계를 넓혀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사실은 남자, 여자 이성을 만나는 게 아니기도 하다는 거다. 오히려 더 큰 인생 첫 깊게 사람과 소통하기, 관계 맺기랄까.








20대 때 나는 연애를 못했다.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자주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했고 그런 것들이 쌓여서 믿음이 사라진 관계로 인해 자주 깨지는 것을 반복했다. 물론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는 바람을 핀 나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선하고 올바른 사람들. 그런데 내가 아주 심하게 화를 낸다던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던지, 거짓말을 한다던지, 했던 말을 안 지킨다던지 다양한 잘못들을 하면서 그들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쳤다. 지금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중 하나는 내가 있는 곳으로 대부분의 남자친구들이 나를 데리러 왔다는 점이다. 심지어 내가 일하던 일터에 와주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그것도 영화관이었는데 새벽 4시에 일이 끝나면서도 말이다. 상대방이 데리러 오길 바라다니. 스무 살이면 다 그랬을까. 라커룸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그의 연락이 없으면 세상 공허해지고는 했다. 그때 영화관 업무 규칙이었던 빨간 립스틱을 바른 얼굴을 하고는 자고 있던 사람을 전화로 깨워 괴롭히기도 했다.


처음 연애가 제일 심했는데 2년을 만나고 여차저차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그 헤어짐을 믿을 수 없었다. 몇 년을 그 사람 집 앞을 유령처럼 떠돌았다. 함께 갔던 장소들을 홀로 찾아갔다. 그 짓을 몇 년을 했다. 결국 아무리 그리워해도 시간이 지나고 사랑했던 때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때는 그게 답답했다. 결혼을 하고 한 가정을 이루고 나서 보니 내가 했던 신뢰가 무너지는 행동들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이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분명히 누군가에게 샹년이었음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때때로, 슈퍼에서 뭔가를 사다 말고, 산책을 하다 말고, 택시를 타서 멍하니 갈 때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그때 샹년이었네- 하고 말이다.









그때 그 샹년처럼 연애한 덕분에 지금의 나는 결혼 생활뿐만이 아니라 생활에 전반적으로 아주 큰 도움을 받고 있다. 일단 내가 하는 업무에 있어서 나는 웬만하면 상대가 원하는 쪽으로, 가까운 쪽으로 약속장소를 잡는다. 그리고 먼저 가서 기다리려고 노력한다. 시간을 어기는 것은 아주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만난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옷차림을 하려고 노력한다. 패션을 보는 눈이 없지만 어떻게 하면 좀 더 깔끔해 보일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둔다.


강의나 강연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연락 온 분 있다면 최대한 소통해서 어떤 결정을 내리려고 하고, 만나야 하는 일이 있다면 내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간다. 가끔은 그렇게 먼 곳에서 온 줄 몰랐다면서 미안해하는 분도 계시지만 나는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진행된 그들과 미팅이 잘 진행되지 않았더라도 처음과 같은 태도로 밝게 문자나 전화의 마무리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끝을 잘 내는 것이 신뢰감을 높이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일까. 두 번째 책에 내가 좋아하는 세바시 구범준 피디님, 유튜버 주언규 님, 강원국작가님의 추천사도 모두 받을 수 있었고, 진행했던 곳과 업무를 진행하는 게 많아졌다. 7월에는 8월의 일을 모르는 프리랜서의 삶이지만 굶어 죽지 않겠구나 정도는 예측할 수 있는 삶이 되었다.





내 시간이 소중하면 상대의 시간도 소중하다. 내가 일을 누군가에게 줄 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준다. 나 역시 누군가와 결말이 좋지 않으면 다음에 연락을 하지 않게 된다.




(이 정도까지 깨달았으니 그때 내가 날린 택시비는 괜찮은 용도로 쓰였고, 그를 그리워하며 마셨던 엄청난 양의 술도 쓰임이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도 될까.

분명히 꽤 큰돈이었지만 말이다. )



과거의 연애에서 샹년이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현재 하는 업무에서는 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저 사람에게는 이 강의를 맡겨도 되겠다.'

'저 작가와 한번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



이런 생각이 드는 신뢰감 있는 사람. 분명히 저 사람은 준비를 잘해올 거야, 늦지 않을거야 생각하게 되는 사람.


만약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모두 나의 구남친들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들 고마워.)





사진 출처: 건축학개론 영화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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