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동네에서 30년 가까이 살았다. 출생지는 전라도. 자란 곳은 인천. 누군가 내게 고향이 어디라 물어보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되물었다.
"태어난 곳을 묻는 거야? 자란 곳을 묻는 거야?"
한 곳에서 오랫동안 살다 보면 동네가 변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놀던 놀이터는 주차장으로 변했고, 발하나 내딛기 힘들었던 풀숲엔 상가가 들어섰다. 70년 가까이 아파트 옆에 자리 잡고 있었던 미군기지는 이제 공원으로 바뀐다더라. 수십 년간 자리를 지켰던 것들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들어서는 동네. 그런데도 같은 곳에서 꾸준히 자리를 지켜가는 이들이 있다.
"아주머니 컵 떡볶이 500원어치 주세요"
"떡꼬치는 짬뽕으로 앞에는 케첩 뒤에는 고추장 발라주세요!"
어렸을 적 친구들과 오락게임에서 승리하면 그 옆 떡볶이집에 가서 간식을 얻어먹으며 승리를 누렸다지. 20년도 넘게 한 자리에서 떡볶이만을 고집하시던 아주머니. 얼마 전 떡볶이를 사러 갔었는데 맛이 여전히 그대로더라. 맛을 기억하는 나도. 맛을 그대로 내시던 아주머니에게도 놀랐던 시간.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풀빵 파시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간판은 누가 봐도 예스럽다. 20년은 벌써 지나셨는지 20년 글자 위로 30년이라는 스티커를 덧댄 곳. 가격은 내 어렸을 적과 비교해 300원이 오른 곳. 오늘 그 풀빵을 먹고 싶어 잠시 들렸다. 여전히 인기가 좋은지 만들어 놓은 건 진작에 다 팔리고 새로 만드시는 중. 5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씀에 돈을 먼저 건네고 기다렸다. 문득, 할아버님께 말을 건넨다.
"할아버지, 한여름에는 풀빵 열기 때문에 덥지는 않으세요?"
"덥지, 그래서 작년에는 한 달 쉬었잖아."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할아버지의 나이 공개.
"올해로 내가 8학년 9반이야."
89세. 내가 아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연세를 그대로 읽으시는 분이 없다. 트렌드인가. 그리고, 요즘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나이를 잘 안 드시나 보다. 꽤나 정정해 보이셨는데 89세 시라니. 놀란 표정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니 젊어서 잘 먹어야 나처럼 곱게 늙을 수 있다는 말과 함께 왠지 모를 자신감을 내비치셨다. 그렇게 할아버지 나이와 내 나이를 계산 해봤다. 순간 반가운 마음에 말이 생각보다 먼저 튀어나와 그만 무례할 수 있는 말을 해버렸다.
"할아버지 저랑 60년 띠동갑이시네요. 저는 29살이거든요"
나이 젊다고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 앞에서 무슨 말인지. 그것도 말이라고 주워 담을 수 없었던 황당한 말에 당황하고 있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허허~ 그렇네. 나랑 동갑이네"라고 말씀하시며 밝은 미소와 함께 갓 나온 풀빵을 건네주셨다. 풀빵을 건네받고 돌아섰는데 등 뒤로 다음 손님을 받으시는 할아버지의 음성이 참 따뜻하게 들리더라.
집으로 돌아가는 길. 풀빵에서 할아버지의 따뜻한 음성이 자꾸만 느껴졌다. 그리고, 37년간 장사해 오신 세월이 느껴졌다. 야금야금 한 입씩 베어 물며 나도 이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풀빵을 만드는 데에 37년의 세월을 공들인 할아버지처럼 무엇을 하더라도 세월이 담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이제껏 변해온 것들보다 앞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겠지만 묵묵히 그 자리에서 본인의 것을 지켜가는 사람들.
역시 세월이 전해주는 것들은 왠지 모를 감동이 있다. 이 풀빵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