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종화 Apr 19. 2019

마음

근대인의 불안과 죄의식에서 비롯된 마음

 이 책 <마음>은 일본의 ‘국민작가’로 추앙받는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다. 그의 소설 중에서도 독자들이 유난히 좋아하는데 읽어보면 왜 그런지 느낄 수 있다. 독특한 구성, 담담하면서도 울림이 있어 가슴을 파고드는 유려한 문체, 사람의 심리에 대한 소세키의 깊은 통찰이 어우러져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인기 있는 이유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독자들도 <마음>을 가장 좋아한다. 무엇때문에 일본인과 한국인이 <마음>을 읽고 깊은 감동을 느끼는 걸까? 이 작품은 우리가 평소엔 내놓고 싶지 않아서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근원적 불안과 죄의식을 건드린다. 그리고 장엄한 분위기마저 자아내는 ‘죽음’을 통해 미학적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가 가진 불안이 무엇일까? 일본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서구식 근대화가 급속도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전통 세계가 해체되었다. 기존의 가치는 낡은 것이 되어 버려야 했다. 새로운 가치는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고 따져보기도 전에 마치 점령군처럼 밀려왔다. 서구 문명이 이룩한 세계관의 정수는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단지 부국강병을 위한 기술과 자본주의 질서만 가져와 이식했다. 가치관이 혼란하면 세상도 어지럽다. 이런 때에는 물질적 부와 권력만이 생존을 보장한다. 부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본능적 투쟁이 삶을 덮어버렸다. 우리가 서구 문물을 수용한 이래 지금까지 겪고 있는 현상이다. ‘각자도생’과 ‘무한경쟁’은 더이상 공공의 영역이 개인의 삶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불안은 공적 영역이 무너져 개개인이 무한 투쟁에 내몰린 상황에서 비롯된다. 불안은 공포와 비슷하지만 다른 개념이다. 공포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위험에 대한 마음의 반응이라면 불안은 내적인 위험 혹은 외적인 위험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는 데에서 비롯된 염려하는 느낌이다. 예측불허한 세상을 나혼자 버텨 살아남아야 하니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공공 혹은 공적인 영역이란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협력하는 공간이다. 인간의 진화는 사회를 이루고 서로 협력하는 일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인간은 사람들과 안정적으로 호혜에 기반한 협력적 관계에서 안전과 안정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공공성 대신 ‘각자도생’을 해야 한다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 대해서 타인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은 항상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죄의식은 어디에서 나온걸까? 불안은 의심을 낳는다. 내가 한 일이 별로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면 실제 원인에 상관없이 나의 잘못이 아닐까 의심한다. 내 잘못 때문에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았으니 죄책감이 든다. 한편, 서구식 근대 교육을 받거나 외국에 유학까지 다녀와도 어릴 때 자라면서 보고 듣고 내면화한 가치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통 가치를 내팽개쳐야 한다. 오랫동안 우리를 지탱하던 가치가 사라진 마음을 깊은 공허와 죄책감이 채운다.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근대 정신이 어딘가 부족하고 속물적으로 보이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 그런데 공허를 감수하면서 추구한 근대 정신이 보잘것없다. 소중한 것을 희생한 결과로 얻은게 겨우 잔인하고 무정한 속물의 세계라니! 소중한 것을 저버린 일에 대해 아쉬움과 죄책감이 들지 않겠는가? 이 세계에서 살기 위해 무한 생존 경쟁의 악다구니 속에서 남을 짓밟은 일 또한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마음>에서 불안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선생님’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그는 세상을 등지고 고고한 모습으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가 중병에 걸리자 재산 상속 문제를 꼭 따지라고 조언한다. ‘선생님’은 아버지가 죽은 후 숙부에게 재산을 뺏긴 경험으로 사람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다. 하숙집 ‘아가씨’를 좋아하지만, 혹시 하숙집 모녀가 자신의 남은 재산을 노려서 자신을 유혹한게 아닌지 의심한다.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다. 친구 K가 신경쇠약에 걸리자 자신의 하숙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기운을 차리게 한다. 그러나 그가 연적이 되자 질투와 의심과 불안을 떨치지 못한다. ‘선생님’은 기회를 봐서 K가 가졌던, 금욕적인 승려처럼 도를 향해 수양한다는 목표를 언급하며 그를 비난한다. 또, 먼저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딸을 달라고 요구하여 허락받는다. 나중에 아주머니로부터 이 사실을 들은 K는 자살한다. 이 일은 ‘선생님’에게 평생의 회한이 된다. 수 년이 지나 ‘나’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는 긴 편지를 쓰고 ‘선생님’ 역시 자살한다. 


 우리가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하는 대신 얻은 것은 ‘각자도생’의 생존투쟁과 여기에서 비롯된 불안, 의심, 죄의식이다. 우리는 평소에 이런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 <마음>에서 ‘선생님’의 유서를 읽으며 무엇이라 정확하게 말할 수 없는 정서적인 동화감을 깊이 느낀다. 그의 마음이 우리와 비슷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쓰메 소세키는 선생님의 말을 빌어 이렇게 썼다.


“예전에 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기억이 이번에는 그 사람 머리 위에 발을 올리게 하는 거라네. 나는 미래의 모욕을 받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치고 싶은 거지. 난 지금보다 한층 외로울 미래의 나를 견디는 대신에 외로운 지금의 나를 견디고 싶은 거야. 자유와 독립과 자기 자신으로 충만한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대가로  외로움을 맛봐야 하는 거겠지.”


 이 말은 개인의 주체성과 독립성을 긍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생존 투쟁의 세계에서 모욕과 존경은 언제든 자리를 바꿀 수 있다. 모욕을 갚지 않으면, 그는 약한 자로 찍혀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다. 존경을 받던 사람이 일단 추락하면 그를 존경하던 이가 앞장서서 물어 뜯을 것이다. 자유와 독립의 대가로 얻은 것은 남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며 곧 불안과 의심을 낳는다. 불신, 불안, 의심이 가득한 사람이 외롭지 않을 수가 있을까? 소세키는 그 자신 영국 유학을 다녀온 근대화 인텔리지만 변화하는 일본 사회에 살아가는 지식인이 어떤 마음 상태인지를 이 작품을 통해 형상화했다. 일본의 근대 소설은 이런 불안을 공공의 영역이 감당하도록 탐구하는 대신, 사적 영역에 머물면서 개인의 내면에 몰두했다.


 ‘선생님’은 유서에서 자살을 예고한다. 나는 ‘K’의 자살이 그랬듯이 ‘선생님’의 자살도 죄의식이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들이 가진 죄의식이 실제 죄를 저지른 결과인걸까. 죄수에게 형량을 선고하는 법정에서처럼 인과관계가 명백할까? 그렇지 않다. ‘K’는 실연 때문에 좌절해서 자살하지 않았다. 친구의 배신 때문도 아니다. 그는 친구의 말을 듣고 자신이 원래 가졌던 결의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긋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우리의 말은 몇 세기가 지나도 그 의미가 변하지 않는데 반해, 이름은 몇 해도 안 되는 기간에 의미가 변한다.” 라고 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했던 말은 시간을 거스르지 않는 이상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그 말을 했던 사람은 그때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 경험과 학습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무시해서도 안 되지만 과거에 얽매어 고정되어 버려도 안 된다. ‘K’는 금욕을 전제로한 수양을 목표로 했으나 하숙집 아가씨를 좋아하면서 변화했다. 사랑이 죄악도 아니며, 오히려 사람이 성숙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한다. 만약 ‘K’가 자신의 변화를 받아들이면, 죄책감으로 자살하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수양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 역시 불안에 사로잡혀 자신이 변한 모습을 의심한다. 확실한 것은 자신이 예전에 수양을 하겠다고 공표한 말이다. 자신의 변화는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 그는 불확실한 자신을 믿지 않고 확실한 예전의 말에 책임을 지기로 ‘각오’한다. 과거에 얽매인 자신과 사랑을 알고 변화한 자신은 하나이지만 다르다. 자아의 분열을 극복하는 대신 자아의 소멸을 결단한다. 모순적인 분열에 비해 비극적인 소멸이 얼마나 장엄한가?


 이렇게 따지면 ‘선생님’의 말과 행동이 ‘K’의 자살과 인과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선생님’의 죄책감도 결국은 불안과 의심에서 나왔다. 둘 모두 이를 해결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혹은 않았다) 죽음은 해결책이 아니다. 둘 모두 자신이 만든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세상과 작별하는 길을 선택했다. 화해하고 싶어도 화해할 세계 자체가 없다는 느낌이 드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선생님’은 메이지 천황의 죽음과 노기 대장 부부의 순사를 보고 자살을 결심한다. 근대화가 시작된 메이지 시대가 끝나는 것을 깨닫고 거기에 속하는 자신의 시간도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형식을 맞춘 선생님의 죽음은 미학적 쾌감을 줄 정도다. 


 이것은 고대 영웅이 운명에 처절하게 저항하지만 마침내 운명에 굴복하여 최후를 맞이하는 그리스 비극이 선사하는 카타르시스와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처한 상황이 마치 신이 내린 운명처럼 극복할 수 없는 벽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인물들은 저항도 하지 않고 굴복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더욱 공감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실현하려 애쓰기 보다는 지금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최고 한계가 ‘선생님’의 죄책감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강 동쪽의 기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