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모두 자유롭고 즐거운 대학생활을 즐길 때 나는 매일 아침 11번 버스를 타고 종점에 도착해서 꼬불꼬불 길을 올라 도서관에 갔다.
그리고 항상 '66'번 자리를 발권하였다.
'66'번 자리는 도서관에서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자리다. 도서관 가장 안쪽에 위치했고'창문'과 '블라인드' 조절이 가능한 자리다. 도서관으로 들어오는 '공기'와 '빛'을 조절할 수 유일한 자리다. 나는 그 권력을 도서관에게 이임받은 것처럼 성실하게 그리고 책임감 있게 이행하였다.
도서관에서 생활은 빠르게 익숙해져갔다. '66'번 자리를 발권하고 엘리베이터를 탑승해서 5층 열람실로 간다. 사물함에서 오늘 공부할거리와 독서대를 꺼내들고 열람실에 앉으면 가장 먼저 오늘 하루동안 공부할 계획을 세운다. 오전에는 주로 수학공부를 한다. 그렇게 3~4시간 공부를 하다가 지겹거나 집중이 안되면 4층 대여실2로 향했다. 4층 대여실2는 대형서점과 비슷하게 '문학', '경제', '인문', '과학', '철학'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이있다. (물론, 내가 대형서점과 비슷하다고 알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였다.)
처음에 대여실2를 방문한 것은 가벼운 도서관 내 산책같은 형태였다. 지금은 4층 대여실2를 오전에 방문 하는 것이 루틴이되었지만. 4층 대여실2는 도서관 중에서도 유독 바짝 마른 미루나무 향이 가득한 곳이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해주는 무거우면서 진한 향이었다. 나는 그 향이 책에서 나는 것인지 대여실2에서 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때는 그 향을 찾고자 나는 책을 한 권, 한 권 만져보고 향을 맡아보곤 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바짝 마른 미루나무 향을 찾기 위해서 한 권, 한 권 확인하던 내가 제목, 표지, 내용에 따라 관심있는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하였다. 4층 대여실 2에 있는 시간은 점차 10분에서 20분, 20분에서 30분, 30분에서 1시간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열람실에서 '창문'과 '블라인드'로 '공기'와 '빛'을 조절해야 하는 것처럼 4층 대여실 2에서는 '바짝 마른 미루나무 향기'를 찾는 것도 내 임무 중 하나였다. 그러다 시나브로 책에 빠지기 시작하였고 '미루나무 향기'를 찾는 것을 깜빡하고 책을 몇 권씩 빌려 5층 열람실에서도 읽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다가 졸리거나 지루할 때 의미없이 핸드폰 만지작 거리지 않고 빌려온 책 1을 읽다가 지겨우면 책 2를 읽다가 시간이 너무 흐른 것 같으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오후 4시가 되면 정말 중요한 일을 시작해야 했다. 오후 4시가 되면 어김없이 열람실 내 공기가 가장 탁 해지는 시간이다. 그리고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가장 강렬하게 도서관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려했다. 나는 열람실 내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창문을 살짝 열어 환기를 하고 블라인드를 적절하게 조절해 햇빛이 열람실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를 했다. 이 일은 열람실 내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조용히 이루어졌다. 단 한명도 이 일을 하는 동안 '흠칫'하는 사람이 없도록 조용하면서도 성스럽게 '창문'과 '블라인드'를 조절했다. 열람실 내 공기가 충분히 환기가 되었다고 느끼는 4시 12분쯤 되면 나는 창문을 조용히 닫고 열람심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5층 테라스로 갔다. 오전에는 '4층 열람실', 오후에는 '5층 테라스'. 내 하루 루틴 중 어김없이 지켜지는 것들이다.
테라스에 들어가기 전 율무차를 뽑는다. 율무차의 따듯함과 텁텁함 그리고 달달함이 내 몸으로 들어온다. 처음 도서관에 온 날부터 나는 이 율무차를 하루에 한잔씩 이 시간에 마시고있다. 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공기 소리가 달콤하다. 핸드폰을 보니 'J'에게 문자가 와있다. 내일 도서관 쉬는 날이 맞는지 확인하는 문자였다.
그 시절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만난 'J'를 아직까지 만나고 있었다. 우리는 도서관이 한 달에 한번 쉬는 정기 휴관일에 만났다. 'J'는 수도권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J'와 만나면 우리는 그리 많은 대화를 하지 않았다. 'J'는 나보다 더 말이 없었다. 내 앞에서 일절 대학생활 이야기를 하지 않는 'J'에게 오히려 내가 대학생활이 궁금하여 물어도 'J'는 대답이 없거나 말이 짧았다. 'J'는 나를 배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와의 대화는 의미가 없었던 것일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였다.
'J'와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출근해서 집을 비우면 우리 집에서 만났고 어머니가 저녁 근무를 하셔서 집에 계신 날이면 산책을 하고 노래방이나 DVD방 또는 룸카페에 가곤했다. 그렇게 'J'와 만나면서 나는 육체적 발란스를 찾았다. 'J'와는 재수생활 이후에도 그렇게 몇년 더 만나다가 갑자기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간다는 말을 남기고 호주로 떠났다. 그리고 호주로 간지 얼마 안 되서 호주인 남자친구가 생겼다고 알려줬다. 호주인인지 캐나다인지 사실 생각이 나진 않는다. 하지만, '남자친구가 생겼다'라는 말이 나와의 '만남'을 그만 하겠다는 뜻은 아님을 나는 알 수 있었다. 'J'는 그저 나에게 '사실전달'을 하려고 한 것 뿐이다. 호주인인지 캐나다인인지 알 수 없는 외국인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로 몇 년 뒤 'J'는 캐나다로 여행을 가서 이번에는 분명히 기억한다, 캐나다 남자를 만났고 캐나다에서 결혼을 하고 살 것이라고 나에게 연락을 했다.
그 후로는 '아직까지 'J'에게 연락이 없다. 15년은 시간이 흐른듯 하다. 하지만 난 확신한다. J'는 어느 날 한국에 와서 나에게 연락을 할 것 이다. 이제 한국에 왔다고.
도서관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혼자만의 시간을 도서관에서 보내면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제법 괜찮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아침 6시마다 어김없이 '66'번 자리를 발권하였고 수학공부를 하다 열람실 2로 가서 '미루나무 향'을 찾고 오후 4시에는 '창문'과 '블라인드'로 '공기'와 '빛'을 조절하고 4시 12분쯤에 5층 테라스로 나와 율무차를 마시고 6시에 저녁식사하고 오후 10시 도서관 문 닫는 시간까지 공부를 하고 책을 봤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6시에 '66번'자리를 발권하였다.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한 시기였다. 공부도 그리고 '미루나무 향'을 찾는 독서도. 그 당시에 독서를 하지 않았으면 더 좋은 대학교를 갈 수 있었을까?스스로에게 되물어봐도 '아니다'라는 결론이 명확하다.
독서는 '깡통'이던 나를 '그릇'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내 안에 모양도 크기도 제각각인 다양한 '그릇'을 만들었다. 그 '그릇' 안에는 또 서로 다른 '차'가 들어가있었다. 얼마나 많은 그릇이 또 얼마나 많은 차들이 그릇 안에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혼자있는 시간에 나는 그릇 뚜껑을 열어 그릇 안에 들어 있는 차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릇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이 차는 무슨 차이고 그 그릇은 무엇인지. 혼자서 질문하고 혼자서 대답한다. 질문은 어제와 같더라도 대답은 매번 달라진다. 그러면서 '그릇'에 들어있는 '차'의 향이 매일 달라진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열람실2에서 맡았던 '미루나무' 향이 잔잔하게 느껴진다. 그 이후에도 다양한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고 묻고 대답하고 내가 주인공이 되어보고 주인공의 친구가 되어보고 저자가 되어보기도 하기를 반복하면서 '미루나무' 향은 시간이 지날 수록 꾸준하게 향이 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하는 대학은 아니었지만 작년과 비교해서는 현저히 높아진 수능점수로 수도권 공과대학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하얀 먼지같은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창문으로 보면서 나는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읽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