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야근이다
지긋지긋한 야근. 이번 주 내내 야근이다.
저녁밥도 못 먹고 야근을 하다가 막차 시간을 좀 남겨두고 퇴근을 한다.
시간을 보니 경복궁역으로 걸어가서 3호선을 타고 가야겠다. 야근 한 날은 좀 걸으며 바람을 쐬고 싶다.
회사 건물을 나가 편의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하나 산다. 담배는 아무거나 얇은 걸로 하나 달라고 한다.
편의점에 나와서 담배를 피울만한 곳을 찾아본다. 저 쪽에 회식하다 잠깐 나와서 담배를 피우는 직장인들이 보인다. 야근하고 지금 퇴근하고 있는 나나, 저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아니, 그래도 밥이라도 먹은 저들이 난 건가? 나도 같이 회식이라도 한 듯이 그들 옆으로 합류한다.
"그건 팀장님이 차장님한테 너무 하신 거죠"
"이대리가 봐도 그래?"
"예, 왜 이렇게 차장님한테만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후, 진짜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저 차장과 저 대리가 하는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 같다.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다. 담배 필터에 있는 동그란 캡슐을 콱 깨문다. 마치, 우리 팀장 귀를 꽉 깨물 듯이.
오늘 야근한 것도 다 팀장 때문이다. 이 인간은 맨날 퇴근시간이 다 돼서야 업무 피드백을 준다.
"김 과장, 그 양식을 말이야, 좀 딱 핵심이 잘 보이게 그렇게 좀 바꾸는 건 어때?"
"저번에 말씀하셔서 한번 바꾸긴 한 건데요"
"아니, 뭔가 핵심이 딱 안 보여"
"그럼, 내일까지 좀 바꿔볼게요"
"내일? 내일 오후에는 담당님께 보고 드려야지. 오늘까지 좀 해줘, 내가 저녁에 볼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속으로 'C발'을 외친다.
아내는 내가 담배를 끊은 줄 안다. 거의 끊었다. 회사에서 이렇게 야근하는 날이나 열받는 날에는 담배 생각이 난다. 마치 철원에서 군 생활하던 그때처럼 말이다. 그 공기 좋던 철원 한복판에서 담배 피우며 보는 밤하늘이나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담배 피우며 보는 밤하늘이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때보다 지금 훨씬 좋은 삶을 살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 "자유"가 없다. 군대에서만 자유가 없는 줄 알았는데 사회에서도 자유가 없다.
4,500원을 주고 담배 하나, 500원을 주고 라이터 하나, 아니 600원이던가 물가가 기가 막히게 올라간다. 연달아 담배를 두 까치를 피우고 화단 근처 선반 위에 담배와 라이터를 가지런히 올려둔다. 두 딸을 키우는 아빠의 최소한의 양심이다. 집에 담배를 가져가진 않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두 까치만 피고 버린 담배를 주어 가는 사람은 땡잡은 걸까? 아니면 건강을 해치는 담배를 더 피우게 되어서 재수가 없는 것일까? 생각해 본다.
담배 연기가 빠지가 외투를 손으로 툴툴 털어주면서 신혼여행에서 사 온 크로스백을 옆으로 고쳐 메고 경복궁역까지 슬슬 걷기 시작한다. 싸늘한 밤바람이 분다. 이 싸늘함이 나쁘진 않다.
벌써 직장 13년 차다. 결혼도 했고 딸도 둘이나 있다. 작년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회사로 이직했다. 그리고 올해 초에 집도 샀다. 남들이 나를 보기엔 그럭저럭 평균 이상으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 것 같은데, 내 마음은 요즘 너무 답답하다. 특히, 이렇게 야근하는 날에는 더욱 그렇다. 이직을 해서 연봉이 올라간다고, 더 넓고 좋은 집을 샀다고 지속적으로 행복하지가 않다.
물론, 이런 답답함 속에서도 진통제 같이 찾아오는 행복한 순간도 있다. 두 딸의 재롱을 보는 것, 친구들과 시시콜콜한 이야기 하면서 소주 한잔 하는 것, 소고기에 레드와인 마실 때, 그 순간만은 행복하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그 순간뿐이다. 진통제 같은 행복은 일시적이다. 또 다른 진통제가 생기지 않으면 계속해서 고통스럽고 답답한 하루가 이어진다. 그래서 다시 아침이 오고 회사에 출근하는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면 행복하지 않다. 누군가는 또 그렇게 말한다.
"원래 매일 행복할 수 없는 거야. 평범한 일상 중에서 행복은 불쑥 찾아오는 거야"
그것도 맞는 이야기다. 이 놈의 세상 이야기는 보통 다 맞긴 맞다. 이 사람 말도 맞고, 저 사람 말도 맞고. 그래도 나는 이제 깨달았다. "행복"이 최고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내 사람이 잘 못되었다는 것을.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진토제 같은 일시적 행복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유"이다.
아침에 딸아이가 늦잠을 자고 싶어 하는데 자는 아이를 억지로 옷 갈아입혀 차에 태우고 부랴부랴 어린이집에 택배 맡기듯 던져 놓고 회사로 출근하는 그런 자유가 없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 아이가 늦잠을 자고 싶어 하거나 아프면 그거에 맞게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의 자유라도 필요한 것 아닐까? 그게 어려운 자유일까? 점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이런 공포도 찾아온다.
혹시 우리 딸들도 나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 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자유를 찾아야겠다.
'디지털 노마드'
언젠가부터 이 단어가 인터넷 세상에서 종각역 앞 비둘기처럼 보기 쉬운 세상이 되었다. 나도 내 '자유'를 찾기 위해서 책도 많이 보고, 블로그도 자주 보고, 유명한 유투버들의 영상도 봤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말에 와이프한테 잔소리도 들어가며 유료강연도 듣고 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이야기만 한다.
"부동산을 사라! 부동산은 배신하지 않는다!"
"미국주식에 적립식으로 장기투자해라! 복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퍼스널 브랜드를 해라! 퍼스널 브랜드는 배신하지 않는다!"
나도 부동산 투자도 하고 있고, 미국 주식도 하고 있고, 블로그도 하고 있는데 삶이 그대로다.
그리고 웃긴 건 나처럼 부동산 투자도 하고 미국 주식도 하고 블로그도 하는 사람이 우리 팀에만 3명이나 있다. 내 동기 이 과장, 후배 박대리, 신입사원 배사원. 더 이상 특별한 것도 아니다.
어느새 벌써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3호선을 타고 홍제역으로 향한다. 얼마 전에 이사한 월셋집이다. 와이프도 복직하고 아이들도 모두 직장어린이집을 다녀야 해서 비싼 월세를 지불하고 회사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왔다. 역시 돈이 좋긴 하다. 서울 끄트머리에 살 때는 지금보다 더 새벽같이 일어나서 아이를 차에 태우고 한 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어린이집에 왔는데 이제는 20분이면 도착한다. 돈으로 40분이라는 자유를 샀다. 구파발행 열차가 들어온다. 대화행을 타야 하는 사람들의 한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사람들은 모두 핸드폰을 보고 있다. 마치, 건전지가 다 된 사람들처럼 핸드폰 화면을 보며 충전을 시작한다. 무엇을 충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홍제역에 금방 도착했다. 내리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어슬렁어슬렁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호랑이처럼 텅 빈 역을 올라간다. 경복궁역의 공기와 홍제역의 공기가 다르지 않다. 차갑고 싸늘하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또 담배 생각이 난다. 하나만 더 피고 들어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까 회사 앞 화단 위에 두고 온 담배가 옛사랑처럼 그립다. 어쩔 수 없이 집으로 올라간다.
엘리베이터 내 광고판은 아침에 본 광고가 똑같이 나온다. 유명 연예인이 나와서 갈비탕이 맛있다고 소개하는 광고. 사보니 고기가 거의 없던 그 갈비탕 광고. 갑자기 회사에서 일하고 온 나나 엘리베이터에서 계속 광고만 한 광고판인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광고판에 동질감이 느껴진다. 맘 같아선 떼어와서 집에 들어가 원목의자에 앉혀놓고 같이 맥주라도 한잔 마시고 싶다.
"광고야, 오늘 하루 어땠어?"
"오늘 하루도 똑같았지. 엘리베이터에 가만히 붙어서 오르락~내리락~"
"너나 나나 진짜 똑같다"
"맥주나 한잔 하자. 키이야~맥주 시원하네"
"14층입니다" 광고판과 맥주 먹는 상상이라니. 이제 나도 미친 게 아닐까 싶다. 이게 다 야근 때문이다. 현관문에 비밀번호를 누른다. "6666" 내가 좋아하는 숫자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은 캄캄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보통 먼저 잠에 드는 둘째 방에 가보니 천사 같은 아니 천사인 내 딸이 자고 있다. 담배를 피우고 들어온 상태라 멀리 문 앞에서만 한참 딸아이를 쳐다본다. 이게 평범한 일상에서 한두 번 찾아오는 행복인가? 내 딸을 하루 24시간 중에 아침 1시간 동안 밖에 못 본다니. 이건 행복이 아니다. 비극이다. 방문을 조심히 닫고 안방으로 향한다. 안방 문을 살짝 열어보니 와이프와 첫째가 자고 있다. 희미하게 와이프 핸드폰에서 아이가 잘 때마다 틀어 달라고 하는 '하푸' 동화가 들린다."아기곰 하푸의 모험!"
안방문을 닫고 거실 화장실에서 간단히 손만 씻고 나와 김치냉장고에 들어있는 맥주를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맥주 전용잔에 맥주를 콸콸 따라 흰 거품을 노란 맥주보다 많게 만든다. 그리고 시원하게 한 모금 들어마신다. '와 이 맛으로 야근하지'는 개뿔... 이것도 진통제다. 한 모금 더 마시면서 갑자기 엘리베이터의 광고판이 또 생각난다. '진짜 떼어와서 의자에 앉혀서 먹을까?' 야근하고 늦게 집에 와서 나도 외로운가 보다. 핸드폰이나 좀 봐야겠다. 핸드폰에 카톡이 많이 와있다. 어디 보자. 엇 송진에게 카톡이 와있다.
"주말에 머 하냐?" 1시간 전쯤 온 카톡이다. 내 친구 송진이는 얼마 전에 결혼해서 아직 아기는 없다. 나의 파이어볼 친구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 유명한 회사에 다닌다. 카톡을 보낸다.
"주말에 머 하긴, 육아해야지" 바로 답장이 온다.
"재수 씨한테 딸들 맡기고 오랜만에 저녁이나 먹자"
"뭔 일 있어?"
"뭔 일은 무슨 일이 있어. 오랜만에 얼굴 보자는 거지"
"알았어, 내일 와이프 기분 좋을 때 말해볼게"
"아후~하남자냐"
"하남자? 야 그래도 난 아직 상남자여!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그러는 거지. 일단 알았어"
애 둘 키우는 게 쉬운 줄 아나. 와이프한테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모르겠다. 와이프도 최근에 내가 계속 야근하느라 퇴근하고 직장 어린이집에서 첫째 데려오고 와서 씻기고 하느라 피곤할 텐데...
근데 나도 오랜만에 송진이를 만나서 놀고 싶다. 내일 잘 말해보자. 남은 맥주를 한 입에 몰아넣는다. 키야~맛있긴 맛있다. 얼른 씻고 자야겠다. 내일은 야근을 안 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