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12년을 함께 걸어온 길의 끝에서 나 홀로 남았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동네 친구들과 함께 했었고 초등학교, 중학교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편에 속했다. 중학교 때는 반에서 1등도 여러 번 했다.
고등학교는 비평준화로 내신이 반에서 7등은 해야 갈 수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나는 어느 순간 공부로는 평범한 학생이 되어버렸다. 내 기억에 평범한 학생이 된 그 시작은 '우리나라 역사적인 스포츠 행사'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니면, 그전부터 그저 평범한 학생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2002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 우리나라에서 역사적인 월드컵이 열리게 된다. 4강을 기원하는 뜨거운 열정이 내 안의 열정도 모조리 빼앗아갔고 그 열정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나 생각도 없었다. 선수들의 경기력과 집중력이 올라갈수록 내 시험등수와 자신감은 하락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난 공부로 중간쯤 하는 학생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상위권으로 진입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마치, 은퇴를 앞둔 경주마처럼 말이다. 화려한 영광이 중학교 시절 잠깐인 안 쓰러운 학생이었다.
월드컵이 끝나 갈 무렵 난, 특별한 이벤트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학생처럼 연애를 하게 되었다. H는 같은 학교 다른 반이었다. 남녀공학인 학교는 당시에 남자 반과 여자 반이 짝을 맺는 짝반 같은 개념이 있었다. H와 나는 짝반이라서 같이 운동장에서 월드컵 응원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하게 되었고 그 시절 우리의 사랑처럼 서로 호감만 있으면 쉽게 '버디버디'로 사귈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호감을 확인하고 그리고 만나기로 약속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쥐뿔도 없는 남자'가 미인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기가 학창 시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연애를 하게 되었고 그 연애는 '어떠한 목적'도 없는 만남이었다. 가끔 같이 하교를 하면서 집에 데려다주고 주말에 만나서 영화 보고 캔모아에서 빙수 먹는 수준의 데이트였다. 아무 목적과 의미가 없는 연애. 20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연애이다. 차마,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학생들의 만남.
우리는 월드컵 4강 기념을 축하하듯 4달 정도 연애를 하고 헤어졌다. 헤어졌다는 표현도 거창하다. 20년도 훌쩍 지난 지금 뚜렷하게 생각나는 건 오로지 H의 이름뿐. 어떤 영화를 봤는지, 캔모아에서 빙수를 먹었는지 파르페를 먹었는지 우리가 손은 잡았었는지 어느 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그 시절에 그 만남과 헤어짐 속에 느낀 내 감정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러고 난 몇 달 뒤 다시 또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반 J를 만났다. J는 순대요리를 먹고 노래방에도 가고 시험이 끝나면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같이 보냈다. 순대요리를 먹고, 노래방에 가고, 시험이 끝나면 우리 집에 와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을 일정하게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마치, 태엽 감고 돌려야 돌아가는 인형처럼.
내가 살았던 광림시는 그런 동네였다. 공부를 잘한다고 알려진 고등학교에서 특별하게 공부 잘하는 학생은 1~2명뿐. 다들 지역 내에서는 공부 잘한다는 학교로 알고 있고 다니는 학생들도 자부심은 있지만 본인들이 얼마나 우물 안의 거북이인지는 모른다. (개구리는 진부하니 거북이라고 해보자)
중간고사, 기말고사 기간에만 공부를 하고 주말에는 특별하게 공부를 하지 않는다. 고3 때라고 다르지 않았다. 남자 학생들은 반과 반끼리 대항전 축구시합을 하고 여자 학생들은 어디선가 모여 자기들끼리 수다를 떨고 남자 학생과 여자 학생이 만나면 순대요리를 먹고 노래방에 갔다가 집에 온다. 아니, 노래방에 갔다가 순대요리를 먹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또, 친구네 집에 부모님이 여행을 가시면 어떻게 몰래 술을 사 와서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종이컵에 따라 마시고 싸구려 안주를 입 안에 넣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학교에 와서 무용담처럼 물어보지도 않은 친구들에게 말한다. "아 어제 개 많이 마셨네" 소주 반 병도 먹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게 광림시에서의 나의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고3 때는 야자를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밤늦게까지 남아있을 때, 우리보다 일찍 집에 가는 후배들을 보며 '나도 집에 가고 싶다'를 외치던 아무 특색과 생각이 없는 깡통 같은 학생이었다. 그렇게 깡통 같이 보내던 시절에 나는 '대치동'이라는 곳이 있는지도 몰랐고, '대치동 학원가'가 그렇게 유명한 것도 몰랐다. 그리고 학생들이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야 하는 것도 몰랐다. 나도 몰랐고 우리 부모님도 몰랐다. 아니면 알았어도 나에게 그런 교육을 시켜줄 수 있는 여건까지는 안되셨을 것이다.
결국, 깡통 같던 고등학교 생활의 끝은 경기도 구석의 '2년제 전문대 합격'이라는 초라한 성적표, 아니 내가 쏟아부은 노력의 전부지만 인정할 수 없는 결과만 남게 되었다. 전문대 합격을 핸드폰 문자로 통보받는 날, 나는 월 30만 원 주고 기타를 배우고 있었다. 30만 원은 어머니가 주신 돈이었다.
어머니는 노인요양센터에서 교대근무를 하시는 사회복지사셨다. 교대근무를 하시느라 야간 근무를 자주 하셨는데 그렇게 벌어오신 돈을 이름도 모르는 기타 선생님에게 나는 가져다주고 있었다. 어머니가 본인보다 무겁고 남자인 어른을 들어서 소변, 대변보는 것을 도우면서 번 돈을 나는 이름도 모르는 기타 선생님에게 월 30만 원씩 두 번이나 가져다주었다. 어머니가 밤을 새우고 벌어오신 돈을 말이다.'깡통 같은 새끼' 그게 내 모습이었고 그렇게 30만 원을 두 번씩 갔다 바치면서도 기타 줄 하나 당길 줄 모르는 게 내 학생시절 모습이었다. 기타를 잘 치는 것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어디 가서 "나 기타 배워"를 말할 수 있는 소재거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나는 기타를 배우는 '특별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뽐내고 싶었다. 기타를 전혀 못 쳐도 그리고 그 어떤 돈으로 배우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기타를 배우는 나'가 중요했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신기하게 4년제를 붙었다. 그것도 이름을 다 들어본 학교들이었다. 누구는 수시 2차로, 누구는 추가합격으로 합격했다. 내가 중학교 때 1~2등을 할 때 7등 하던 친구는 인서울 하고 나는 30~40등 하던 친구들과 같이 전문대를 가게 되었다. 1~2등 하던 시절 30~40등 하는 놈들이 '인생 어떻게 살려고 저러나, 깡통 같은 놈들'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도 '깡통'이었던 것이다. '깡통'은 '깡통'을 알아본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아닌가?
기타 치고 돌아온 저녁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내가 어려서부터 살던 우리 집, 주공아파트 19평 주방 식탁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나에게 아버지는 식탁에 앉아보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물으셨다.
"그래서 대학교는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요, 다 떨어지고 2년제 전문대 하나 붙었죠"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짧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길지도 않은 침묵 뒤에 아버지가 다시 말씀하셨다.
"아빠 정년도 얼마 안 남았고, 학비 지원받으려면 거기라도 다니고 군대 갔다 오는 걸로 하자"
갑자기 그 말에 내 미래가,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이럴 때 많이 쓰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주마등은 도대체 어떻게 스쳐가는 것일까?)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것이지?' 지금도 '깡통'인데 미래에도 '깡통'일까? '재활용이라도 할 수 있는 깡통이 될까?' 기타라도 잘 배웠으면 '기타 치는 깡통'으로 어떻게든 먹고살았을 텐데, '60만 원 주고 기타 배웠지만 하나도 못 치는 바보깡통'으로 소개되면 재활용장에서도 안 받지 않을까 그러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단어를 내뱉게 되었다
"재수할게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는 단어라도 들은 듯 전혀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금세 그 단어가 '깡통'이 '1년 동안 놀고먹으면서 공부하는 척'하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하셨다.
"재수는 무슨 재수야!, 우리 형편에 재수시킬 여유 없다. 그냥 붙은 학교 가"
"학원 안 다니고 독학으로 할 테니까 재수할게요"
이제까지 재수를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내가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이유가 재수를 할 계획을 말하기 위해 살아온 것처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들 대학교 가는데, 저만 그럴 수 없잖아요. 도서관에서 혼자 독학할게요. 돈도 별로 안 들게 할게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속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오랜 침묵 뒤에 어머니가 먼저 말씀을 꺼냈다.
"아들, 열심히 할 거야?"
"아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엄마는 당연한 소리를 잘하네"
아버지는 끝내 아무 말씀이 없었고, 나는 "열심히 할게!"를 외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불 속에 들어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깡통 같은 새끼, 아무것도 할 줄도 모르는 깡통 새끼'
나 자신에게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오늘까지도 난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었다. 중학교 때의 성공이 나에게 독이었을까? 모의고사, 내신에서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도 수능 성적표는 초라하지 않을 것이라 근거 없이 자신했다. 하지만 초라하지 않을 것이라던 내 수능 성적표는 '오즈의 마법사 양철 나무꾼'이 봐도 더 잘 나올 것 같았다. 그게 너무 멍청하고 속상해서 이불속에서 울었다. 그렇게 흐느끼며 울고 있는데 '기타'생각이 났다. 대학도 못 들어간 놈이 기타를 배운다고 어머니에게 60만 원이나 받아가고... 그게 나를 두 번 울렸다. 너무너무 바보 같았다. 어머니가 한 달에 15일은 야간 근무를 해서 받아오는 돈 60만 원. 그걸 일주일에 2번 가는 기타 학원에 상납한 것이다. 수능을 못 본 것보다 대학을 떨어진 것보다 점점 그게 더 바보 같아서 눈물이 더 많이 나왔다. 소리가 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물었다. 그럴수록 울음소리는 맛있는 풀을 뜯으러 농장 밖을 뛰쳐나가는 양처럼 입 밖으로 나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날, 부모님은 내 울음소리를 들었을까? 아직도 물어보지 못하였다. 혹시나 어머니가 같이 우셨을까 봐...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나는 내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에 가야 있는 도서관을 방문하였다. 그 도서관은 이제껏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서관이었다. 종점에 내려서도 그 도서관을 가기 위해서는 꼬불꼬불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했다. 산 아래 위치한 도서관이었다. 매일 다니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머릿속 들려는 순간 반 정도는 이름 모를 나무로 가려진 도서관이 내 눈에 나타났다. 어딘가 작아 보이면서도 커 보이고 오래된 것 같으면서도 신축 같은 그런 신기한 도서관이었다.
출입문에서는 경비 아저씨가 서 계셨다. 나는 갑자기 두려웠다. '깡통은 못 들어가면 어떻게 하지?' 경비 아저씨를 쳐다보지 않고 딴청을 피우며 도서관에 들어갔다.
도서관은 따듯했다. 탄탄한 유리벽을 뚫고 아침햇살이 로비를 밝게 비추고 있었고 무거운 가방을 멘 사람들이 분주하게 좌석표를 끊고 있었다. 어떤 시스템인지 눈으로만 대충 훑어보고 나는 도서관 내부를 살펴보기로 했다. 도서관은 총 6층이었다. 1층은 도서관 사무실, 2층은 잡지와 VOD코너, 3층은 도서대여실 1, 4층은 도서대여실 2,5층은 열람실이었고 6층은 식당과 매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느낌이 좋았다. 조용한 분위기와 특히 각 층마다 테라스가 있고 테라스로 나가면 산을 바라볼 수가 있는 점이 특히나 좋았다. 자판기에서 250원을 내고 뽑은 율무차를 한 잔 들고 테라스 의자에 앉았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이 산바람을 타고 차갑게 몰려왔다. 율무차의 따듯함이 없었더라면 깜빡하고 그 기세에 놀라 도서관을 뛰쳐나갈 뻔했다. 율무차를 뽑아서 들고 오기를 천만다행이다. 손에 들고 있는 율무차가 나를 살렸다. 율무차를 한 모금 더 마신다. 텁텁함과 달콤함을 감싸고 있는 율무가 내 목 안을 따듯하게 달군다. 그리고 심장도. 그리고 머리도. 율무차는 내 몸 구석구석 들어간다. 나는 율무차가 부족하지 않게 들어가기 위해서 꿀꺽꿀꺽 계속 그 뜨거운 율무차를 삼킨다. 혓바닥이 델 것 같은 고통도 느껴지지만, 그 사이 나는 걱정과 두려움을 모두 잊어버렸다.
'그래해보자! 율무차도 이렇게 도와주잖아.' 나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목소리로 말한다.
'해보자!' 그 큰 목소로리는 소리는 없지만 내 몸속의 율무차와 함께 뒹굴며 내 몸에서 진동한다.
그리고 그 도서관은 날 1년 동안 품으면서 '깡통'에서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