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강남 대신 마포에 집을 산 이유

굴비 같은 강남

by 라구나


천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거칠게 올라가던 서울 부동산 시장이 22년 하반기부터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버렸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집도 시세가 꺾이고 거래가 안되기 시작했습니다.


12억, 11억, 10억, 9억...


부동산 시장이 얼어버리니 호가는 내려가지만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파리밖에 날리지 않는 부동산 시장에서,

하이에나처럼 시장을 기웃기웃하며 괜찮은 사냥감이 있는지 돌아다니며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예전에 신혼집을 구할 때는 집 구하는 것이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습니다.


지하철역이랑 가까운 역세권인지

브랜드 아파트이고 대단지인지

층은 어떻고 향은 어떤지


이런저런 부동산 요소들만 살펴봐도 충분히 좋은 집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딸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딸의 생애 주기도 고려해야 했습니다.


어린이집을 어디로 보낼 것인지

초등학교는 어디서 다닐지

아이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인지


즉, 신혼 때는 고민하지 않던 '학군'이라는 혜성 같은 존재가 나타난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지요.


이것저것 비교하니 머리가 아팠습니다.

고민을 해보니 가장 핵심은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장 어린이집을 다닌다 안 다닌다.


직장 어린이집을 다닐 경우에는 간단했습니다.

저랑 함께 직장 어린이집을 다닐 수 있는 광화문 근처의 아파트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좋게 보이는 곳은 '마포' 중에서도 마포대로 축선상에 있는 '동마포'였습니다.


자차 운전도 좋지만 5호선 이용이 편리하여 광화문뿐만 아니라 여의도로도 자차나 대중교통 모두 출퇴근하기 편했습니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신축 아파트들이 몰려 있어서 맞벌이 직장인들에게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마포가 좋은 곳임은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강남보다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어린이집을 직장 어린이집을 안 보낸다고 하면...

강남구 역삼동에 소형평수는 가능해 보였습니다.


진선여중, 진선여고라는 강력한 여아 학군도 있어서 장기적으로 딸을 키우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지요


하지만, 당장 역삼동으로 이사를 가게 될 경우 아이를 키울 수 있는 방법이 모호했습니다.


역삼동에서 광화문까지 매일 자차로 출퇴근하는 것은 지금 사는 곳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직장 어린이집은 단념해야 하고,

직장 어린이집을 다니지 않고 동네 어린이집을 다니면 하원하고 아이를 돌봐줄 사람도 필요했습니다.


역삼동 집을 사는 케이스는 영끌을 해야 했습니다.

저와 와이프가 버는 소득을 대부분 대출 원리금을 갚는데 쓰고 하원 도우미도 이용하게 되면 당장 먹고 살 생활비가 빡빡했습니다.


양가 부모님들께 하원 도우미 도움을 요청하려고 해도 사는 곳이 멀어서 물리적으로 쉽지 않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역삼동 집을 사는 것은 '굴비 한 마리를 매달아 놓고 밥을 먹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남구민'이라는 굴비를 매달아 놓고 온 가족이 정신력으로 버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저 혼자 살면 굴비를 매달아 놓고 물에다가 밥 말아먹고 살면서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결혼도 했고 자식도 있으니 저만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현재만 보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미래만 바라보며 사는 것도 옳지 않았습니다.

현재와 미래의 적당한 밸런스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직장 어린이집을 다니기 위해서 강남구 역삼동이 아닌 마포구 공덕동에 집을 매수하였습니다.

(정확하게 하면 마포 집을 싸게 사두고 출퇴근 가까운 서대문구에 살고 있습니다.)


2년이나 흐른 지금...

저는 제 선택에 후회하지 않고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돈으로만 보면 역삼동에 집을 사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직장 어린이집에서 잘 크고 잘 지내고 있어서 역삼동 집을 산 옵션을 혼자 상상해 봐도 지금보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행복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강남에 가야지만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소유하냐, 어디에 속하느냐에 상관없이 현재를 어떻게 보고 어떤 마음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행복이 결정됩니다.


'행복은 아이스크림'입니다.

당장 맛을 보지 않으면 녹아 없어지게 됩니다.


직장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딸들과 만든 추억을 떠올리면...

추억이 조각조각 퍼즐처럼 작은 행복들로 촘촘하게 쌓여있습니다.


강남이야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갈아타면 되겠지만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행복하기는 하지만....

회사를 다니면서 직장 어린이집을 다니는 것이 아빠로서 이렇게 힘든 일인 줄은 몰랐습니다.


keyword
이전 04화딸과 함께 출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