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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4년을 혼자 보내며 얻은 것

우리는 누구나 처절할 정도로 외로움을 겪어봐야 한다.

by 라구나

대학생활은 주로 혼자서 냈다.

처음에는 4년이라는 대학생활을 혼자 보내게 될 줄 몰랐다.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도 가서 어울려 보고자 했는데 그 첫 '오리엔테이션'이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대학 행사가 돼버렸다.


초중고등학교를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 생활하다가 갑자기 한 살 어린 동생들과 생활하게 되면서 문제가 생 겼다. 는 아직 사회생활을 그리고 대학생활을 몰랐던 것이다.


오리엔테이션 목적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각자 간단히 자기소개를 했다.

내 자기소개가 끝난 이후에 내 옆자리에 앉아있던 안경잡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초면에 '안녕'이라고 물어보는 것 그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웅 안녕"

나는 최대한 퉁명스럽지만 퉁명스럽지 않은 것처럼 인사했다.

"나는 XXX라고 해, 아까 나보다 한 살 많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아?"

'맞아?' 잘 못 들은 거 아닐까 싶었지만 그럴리는 없.

"웅 재수했어"

내가 재수했다는 말에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뭔가 준비해 온 듯 멘트를 내게 선보였다.

"그래도 대학교는 학번으로 한다니까 말 편하게 할게. 잘 지내보자"

"..."

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알 수 없는 놈.

그 재수 없는 놈과의 재수 없는 대화 이후로 난 그 재수 없는 놈과 두 번 다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놈 말도 맞다.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지만 오늘 밤에 있을 일을 예상치 못하고 낡은 속옷을 입고 온 것처럼 나는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내 나이를 하나 접고 들어가면서 같은 학번인 동생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쩌면 그 '재수 없는 놈'의 솔직 덕분에 환상 속에 존재하던 대학생활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고, 나는 다시 도서관에서 재수하던 시절로 돌아가 '책과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책과 나만의 시간,
읽고 묻고 생각하고 답하고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도, 밥을 같이 먹을 친구도 아무도 없었다.

나의 대학생활은 도서관에서 보내던 시절보다 더 외롭고 고독했으며 처절하기까지 했다.

매 학기 수업은 주 3일 또는 주 4일로 몰아넣고 학교에 가는 날을 최소화했다.

외로움은 그래도 참을 수 있었지만 20대 초반에 배고픔은 참기가 어려웠다.

식사는 주로 '칼로리 바란스'로 했다.



왜 처음에 '칼로리 바란스'를 먹기 시작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건 내가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는 '칼로리 바란스'만 먹어야 하는 것처럼 정해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마치, 재수시절 도서관에서 매일 아침 '66'번 자리를 발권하고 '블라인드'로 햇빛을 조절하고 율무차를 먹었던 것처럼 말이다.

'칼로리 바란스'를 로 빈 강의실에서 먹었다.

'칼로리 바란스'는 대학시절 내 가방에 항상 있던 친구 같은 존재지만 씹는 기분이나 맛은 유쾌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대학교 1~2학년이던 어린 시절에는 혼자 점심을 식당에서 먹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대학생활에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큰 의미가 없었지만 학업에 대한 열정은 가득했다.

재수생활 이후로 '공부' '독서'에 대한 내 태도가 학창 시절과는 달라져 있었고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나에게 소중한 시간이었다.

리고 그런 태도가 대부분의 대학생과는 다른 내 '삶'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를 누군가 봤다면 내가 굉장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으로 기억할 것이다. 항상 앞자리에 앉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하지만, 시험점수는 항상 평균이나 살짝 아래였다. 핑계일 수 있겠지만 나는 대학교 시험에 '족보'가 있다는 것을 대학교 3학년 때쯤 처음 알았다. 혼자서 생활했기에 그런 정보도 너무나도 늦게 알았던 것이다. 물론, 내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다면 어떻게든 잘했을 것이. 나는 시험을 잘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게 혼자서 강의실이나 도서관에서 책 보고, 배고프면 '칼로리 바란스'를 먹고 하는 대학생활이 계속됐다.

그러다 학부 과정 중에서 조를 편성해서 실험을 하는 과목이 있었고, 거기서 'M'을 만나게 되었다.

'M'은 나와 동갑으로 재수를 했고 지방 출신이었다. 재수를 한 것도 그리고 사투리를 쓰는 것도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지만, 'M'이 매력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M'은 누가 봐도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M'은 나를 소 평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봤다. 실험이 시작되기 전이나 쉬는 시간에 무엇인가 읽고 있는 내가 'M'에게는 신기게 보였다.

가벼운 인사정도는 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M'이 나에게 문득 말을 걸어왔다.

"책 보는 게 재밌어?"

"그냥, 보는 거야"

"무슨 책 보는 거야?"

"XXXXX" 무슨 책을 보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는 누구랑 친해?"

누구랑 친하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동네 친구 송진이랑 친하냐고 묻는 걸까? 아니면 대학교에서 누구랑 친하냐는 것일까?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M'이 다시 대화를 이었다.

"점심은 먹었어?"

"대충 먹었어" 실제로는 실험에 오기 전에 빈 강의실에서 '칼로리 바란스'를 먹었다. 왜 '칼로리 바란스'를 먹었다고 말을 못 했는지 지금도 후회된다. '칼로리 바란스'가 얼마나 부끄럽다고 말이다.

그 말을 숨긴 내가 더 부끄러웠고 '칼로리 바란스'에게 미안했다.


'M'과의 대화는 그 정도 수준에서 몇 달을 머물렀다.

안부 인사, 무슨 책을 보는지 묻는 질문.

당시에 나는 아직도 고등학교 때 만난 'J'와 만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만남이 일반적으로 남녀 사이에 말하는 '사귐'인지는 혼란스러웠지만, 는 'J'를 만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J'가 매우 이례적으로 나에게 먼저 대학생활에 대해서 물었.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 없어?"

'J'는 내 몸에서 떨어져 나와 속옷을 챙겨 입으며 물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 없냐니?' 'J'가 말하는 바가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만나는 사람이라니?"

"웅,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 없어?"

"음... 만나는 사람 없는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물어보기도, 무엇이 궁금한지 물어보기도 'J'에게는 모두 적당하지 않은 질문이다.


'J'는 더 이상 나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맥주 캔을 뜯어서 빠져나간 수분만큼 맥주로 채우고 잠이 들었다. 기름이 떨어진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기계적인 맥주였다.

그리고 계절이 5번은 바뀐 것 같은 시간이 흘러서야 나는 그때 'J'가 나에게 물어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다음 날 나는 'M'과 처음으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실험이 끝나고 내가 먼저 점심을 먹자고 했고 'M'은 가 물어볼 것을 미리 'J'에게 연락을 받아서 안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 나는 'M'과 목요일마다 점심을 같이 먹고 산책하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M'은 사람을 편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 자상했고 친절했으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 줬다.

'M'은 자주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내가 본 대학생 중에서 가장 특별해.


하지만 또 이렇게도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네가 외로워 보여.


'M'은 진심으로 내게 말했다.

그리고 난 그 어느 말에도 'M'에게 대답하지 않았지만, 당시에 나를 돌아보면 '특별한 척' 했지만 '외로움'은 사실이었다. 아직 어렸다는 것이 이유였을까? 아니면 '혼자'살아가는 삶의 시작이어서 그랬을까? 혼자가 편한 것은 맞았지만 가끔은 처절하게 외로움이 들었다.


어느 날, 빈 강의실에서 '칼로리 바란스'를 먹고 있는데 전공 수업시간에 자주 보던 학생들이 무리 지어 쉴 공간을 찾으려고 내 빈 강의실로 들어왔다.

'칼로리 바란스'를 숨 죽여 먹고 있는 나에게는 그다지 편하지 않은 순간이었고 그럴 때마다 내 마음 한 켠에서는 '그들이 싫지만 어울리고 싶다'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또 다른 내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또 다른 나'는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옵션이었고 나는 내 외로운 대학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피해 하나 남은 '칼로라 비란스'를 들고 난 화장실 변기통에 앉아서 '우적우적' 퍼석하게 씹어 먹으면서도 나는 내가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 되뇌었다.


나는 이 길을 혼자 가야 해.
돼지는 돼지우리에 있기 때문에 돼지인 것이지
돼지우리를 벗어나 혼자 떠나면,
나는 돼지가 아니라 사자가 될 거야.

'M'과 물리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지만 심리적 시간은 길었는지 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J'보다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M'이 싫지 않았다. 싫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나도 다른 마음이 있음을 애써 모른 척할 뿐이었다.

'M'은 학기 마지막 실험 수업을 앞두고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내일 몇 시에 집에 가?"

"마지막 수업이 5시라서 그거 끝나고 갈려고"

"저녁 먹을까?"

'M'과 점심은 매주 목요일에 먹었지만 저녁은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었다. 자기 'J'가 생각났다. 'J'가 나에게 다시 묻는 듯하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 없어?


나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M'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일 오후에 연락 줘도 괜찮을까?"

'M'에게 따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나는 'M'과 'J'를 동시에 생각했다. 전혀 다른 두 사람. 나이가 같다는 것 빼고는 어느 하나 닮은 점이 없는 두 사람.


사랑인지 의리인지 아니면 '칼로리 바란스' 같은 '육체적 바란스' 때문인지 'M'을 만나게 되면 'J'를 만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 무엇보다 두려웠다. 하지만 'J'는 분명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상관하지 않고 내가 원할 때 그리고 'J'가 원할 때 우리는 만날 것이다.


그건 나에게 있어서 그 어떤 미래도 담보하지 않는 '대학교 오리엔테이션' 같은 만남일 뿐이었다.

나와 'J'의 만남이 미래를 담보로 하고 있는 만남인지 또는 그것이 의미가 있는지 정의될 수 없었고 중요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이었다.

나는 그렇게 혼자만의 '과의식' 속에서 틀린 답을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M'을 만난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M'은 처절할 정도로 외로운 나의 대학생활에서 유일한 '비상구'였다. 'M'과 함께 한다면 이제는 혼자서 '칼로리 바란스'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어쩌면 더 이상 도서관에서 책을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로리 바란스'는 안 먹어도 좋지만 책을 못 보게 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학교에 많은 커플들처럼 우리도 그런 커플 중 하나로 평범하게 지낼 수 있고 그게 또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J'를 지우고 그 자리에 새롭게 'M'을 두고 살 수 있을지는 더 어렵고 복잡한 문제였다.

나는 답을 정하지 못하고 그날 밤 그대로 잠에 들었다.


꿈에서 'J'가 나왔다.

'J'는 나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만나는 사람 있어?

분명 현실에서는 없냐고 물었는데 꿈에서는 있는지 내게 물었다.

나는 'J'에게 말했다.

"'M'을 만나고 있어"

"M은 너에게 어떤 존재야?" 'J'는 'M'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나에게 물었다.

"'M'은 나에게 탈출구야."

"이 세상에 탈출구는 없어. 우리는 탈출할 수 없어"

나는 현실에 나답지 않게 'J'에게 물었다.

"탈출구로 나가보지 않고 어떻게 알 수 있어?"

'J'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나에게 말했다.

"나는 다녀왔어" 그리고 말을 이으며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이 세상에 탈출구는 없어. 우리는 결국 이 세상을 살뿐이야"

아침에 일어나니 내 몸에 담배냄새가 가득했다. 나의 꿈에 담배냄새가 각인되었다.


교양과목이 끝나고 찾아온 점심시간에 나는 어김없이 '칼로리 바란스'를 찾았고 빈 강의실도 찾았다. 'M'에게는 아직 아무 문자가 없다. '칼로리 바란스'를 한 입 더 먹고 어제 꿈을 다시 생각했다.

꿈에서 본 'J'는 'J'가 아니었다. 'J'는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말을 길게 하지도 않는다. 그럼 'J'는 누구였을까?

'J'가 아니라 사실 'J'의 형태를 한 'M'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빈 강의실을 나가 캠퍼스에 숨겨져 있는 보물이라도 찾듯이 어슬렁 거렸다.

보물 찾기를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무더운 여름이었다.

학교 중앙에 위치한 호수 근처에서 태양을 피해 그늘 끝에 가엽게 걸친 벤치에 앉았다.

그 벤치에 'J'와 'M'과 나란히 앉는 상상을 했다.

'J'와 있으면 같이 있지만 혼자 있는 듯했고, 'M'과 있으면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 자체가 낯설었다.


내 길은 무엇일까?

나는 내 길을 가야 한다.


내 길을 가는 것...

무더운 여름날 대학교 캠퍼스에는 손을 잡고 거니는 커플들이 많았다.

''M'과 만나면 나도 무더운 날 손을 잡고 걸을까? 이렇게 더운데 키스를 할까? 더운데 이불을 덮고 같이 잘까? 그리고 같이 맥주를 마실까?'

하지만, 그런 것들이 나에게 '내 길을 가는 것'과 'J'를 만나는 것과 비교했을 때 무슨 의미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저기 무더운 여름날 대학교 캠퍼스에서 손을 잡고 걸어야만 하는 많은 커플들과 내 존재의 차이점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고 나는 더 이상 '칼로리 바란스'를 먹지 않아도 될 것이다.

'칼로리 바란스'를 먹지 않는 삶을 꿈꾸었던 것일까?

그건 아니다. 나는 깡통에서 그릇이 되었고 대학에서 그릇을 늘리기도 하도 그릇에 책을 본 것, 혼자 생각한 것을 넣고 푹 삭히고 있다. 종갓집 뒷마당에서 영겁의 시간을 보낸 장독대와 같이 말이다.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짐승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마늘과 쑥만 먹고 '100일'을 동굴에서 보내라고 했는데, 나는 '칼로리 바란스'를 먹은 지 아직 2년도 되지 않았다.

내 안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완성되기도 전에 '굴'을 뛰쳐나가는 어리석은 호랑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오늘 몸이 안 좋아서 다음에 봐도 괜찮을까?

이마에서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손에서도 땀이 났다. 'M'에게 보낸 메시지는 그늘도 없는 뙤약볕을 느리게 기어갔다. 마치, 다른 선택지도 있음을 나에게 알려주려듯 말이다.

내가 앉은 벤치에 있던 그늘 끝은 어느새 사라져 'M'에게 보낸 메시지와 같이 태양 아래 있었다. 하지만, 난 좀 더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20분쯤 기다렸을까?'M'에게서는 결국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날 밤에도. 다음 날에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 이후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M'을 보지 못했다.

실험 과목에서 'M'과 함께 다니던 친구에게 듣기로 'M'은 휴학을 하고 시험 준비를 한다고 했다.

'M'도 'M' 만의 길을 갔다. 내가 내 길을 가듯이...

'M'이 그렇게 없어진 이후에 내 대학교 생활은 더욱더 혼자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M'과 식사를 하고 산책을 한다는 것이 매력적인 즐거움이었다는 것을 'M'이 사라지자 더욱 부각되었다.


나는 다시 '독서' 그리고 '나'에 대해서 집중했다.

더욱더 '독서' 그리고 '사색'에 빠졌다.

'M'이 사라진 이후 나는 '고전'을 집중해서 읽었다.

고전에 나오는 먼 옛날의 이야기와 현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럼 결국 미래도 먼 옛날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고전'을 읽는 것이 나를 단단하게 해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 안을 들여다보라.
네 안에는 선의 샘이 있고, 그 샘은 네가 늘 파내어야 늘 솟아오를 수 있다.


그렇게 나는 '책'과 더 깊게 대면하고 삶에 대한 생각으로 대학생활을 마무리해가고 있었다.

외로움이 더 이상은 외로움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짝 마른 단풍이 발길마다 바삭하게 밟히는 가을.

나는 더 이상 '칼로리 바란스'를 먹지 않았다.

배고플 때 먹고 싶은 식당에서 (주로 학생회관을 갔지만) 밥을 먹고 그날 읽은 책 내용을 생각하며 학교를 자주 거닐었다. 학교 사람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집에 가려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 정류장은 항상 두 개의 줄이 있었다. 하나는 '앉아서 가는 줄', 다른 하나는 '서서 가는 줄'.

이 날 따라 '앉아서 가는 줄'이 더욱 길었는데, '서서 가는 줄'은 없었다. 마치, 원래부터 '서서 가는 줄'이라는 것은 이 세계에 없었고 그래서 '서서 가는 줄'은 누군가 잘라내서 다른 세계로 보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민하지 않았다. 길게 늘어선 '앉아서 가는 줄' 옆에 내가 '서서 가는 줄'을 만들었다.

'앉아 가는 줄'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가치가 없음을 안다.

그리고 어느새 내 뒤로 사람들이 모여 '서서 가는 줄'에 합류했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2월의 겨울.

나는 졸업과 함께 철원으로 향했다.

철원에 도착했을 때는 함박눈이 하얗게 하얗게 내린 눈을 덮고 있었다.

내가 신은 검정 전투화가 하얀 눈 사이로 깊숙이 들어갔다.

하얀 눈은 짧은 비명과 함께 전투화를 얻어맞았다.

북쪽땅 설국, 철원.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이 땅에는 하얗고 차가운 눈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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