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오페라 대본 번역 경험을 나누고자...
때는 2016년 말쯤이었고, 우연히 페이스북 메신저로 제자로부터 러시아 오페라 대본을 번역해줄 사람을 구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당시에 나는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의 번역 지원을 받은 책을 번역하고 있었지만, 오페라단 측에서 기다려줄 수만 있다면, 생애 처음으로 오페라 대본 번역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다른 번역을 하고 있어서 바쁘지만, 번역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후 국립오페라단의 담당자 연락처를 전해 받고, 그 길로 담당자에게 바로 연락을 했다. 그리고, 형식적이나마 프로필을 보내 달라는 (담당자는 이미 내 프로필을 대략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요청을 받고, 프로필을 이메일로 보냈고, 그날 바로 같이 일을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진행중인 번역이 있었기 때문에, 오페라단 측의 양해를 구해서 1달 보름 정도 후부터 번역에 착수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은 1989년에 러시아 볼쇼이 극장의 내한 이후 28년 만이며, 국내 단체가 직접 제작해서 무대에 올리는 것은 국내 최초였다. 푸시킨의 희곡에 기반을 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 오페라 중 가장 많이 공연되는 대표적인 작품이며, 해외 무대에서는 자주 선보이고 있지만, 국내 오페라단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런 역사적 공연에서 오페라 대본을 번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보리스 고두노프' 대본 즉, 리브레토 번역을 특별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리브레토 번역이 의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는 오히려 의역보다는 직역의 비중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의역보다 직역의 번역비가 더 많았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는 직역을 '외국어로 된 말이나 글을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함. 또는 그러한 번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또한 직역이란 원작을 중시해서 원작의 내용을 최대한 살려서 번역해야 한다는 ‘등가성’ 이론에 기초한다. 직역에 대칭되는 번역은 ‘의역’이며, 의역은 원작의 문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독자의 입장에서 잘 읽히는 것, 즉, 가독성을 중시한다. 물론, 직역이든 의역이든 모두 문장 단위의 번역을 의미한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 리브레토 번역에서 직역이란 문장 단위가 아니라 단어 하나하나를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해당 직역은 악보에 그대로 반영되어서 오페라 가수들이 오페라 연습할 때 활용되었기 때문에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작업이었다.
처음에 번역을 의뢰받으면서 받은 악보는 사실 최종 문자 개혁이 있기 전의 러시아어로 작성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러시아어에는 없는 문자들이 포함돼 있었다), 악보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사를 알아보기 힘든 부분이 상당 부분 포함돼 있었다. 따라서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 오페라 가수인 지인을 통해 악보를 받으면서 겨우 번역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뿐만 아니라, 이렇게 국립오페라단에서 보낸 리브레토와 악보에 적힌 가사가 군데 군데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번역하는 동안 계속해서 리브레토와 악보를 확인해야 했고, 작업하는 중간에 악보의 일부를 바꾸기도 해서 이미 번역한 부분을 다시 번역해야 했던 기억은 되돌아보면 상당히 번거로웠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어려움은 한 마디에 4성부(소프라노, 알토, 바리톤, 테너)가 그려져 있는데, 그들의 가사가 모두 다를 때이다. 오페라 가수들은 각자 자기 파트를 부르면 그만이지만, 이들은 동시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역자는 이 부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내가 작업한 부분은 후에 공연 프로그램북에 들어가기도 했고, 오페라 공연할 때 자막으로 올라가기도 했다.
국내 최초로 제작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에는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배우를 해외에서 초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국내 오페라 가수들이 투입되었다. 대본 번역을 하면서 오페라 배우들 딕션을 지도한 일 역시 평생 잊지 못할 독특한 기억이다. 배우들과의 딕션 지도 결과는 오페라단 직원에게 보고해야 했고, 이 결과가 배우들의 배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처음 이 일을 맡을 때만 하더라도 대본 번역이 전부인 줄 알았지만, 배우 딕션도 하고, 나중에는 음악 감독님 인터뷰 통역까지 하면서 잠시나마 러시아 오페라의 세계에 푹 빠져 살았던 때가 있었다.
번역을 끝낸 후에는 최종 리허설과 공연까지 보면서 러시아 오페라가 주는 묵직한 매력에 매료되었던 기억이 있다. 새로운 경험일 것이란 판단은 내게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준 셈이다.
음악 감독님 인터뷰 통역하는 모습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