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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연 Jun 09. 2022

일방적 친분

동영상 강의 

나는 눈썰미도 없고, 눈치도 조금 부족한 편이며, 기억력도 별로 좋지 않다.  심지어 나는 외국어를 가르치는 강사이다. 이런 내게도 내가 가르친 학생 얼굴 정도는 기억한다고 자부하던 시절이 존재한 적이 있다. 물론 나름 좋은 기억력이라는 것도 내가 가르친 학생 얼굴 정도를 기억하는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학생의 얼굴과 이름을 연결시키거나, 이름과 성을 연결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튼, 변변치 않은 기억력으로 하루하루를 버티며 비난과 욕을 그럭저럭 피하며 살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한 번은 학원 앞에서 어떤 여성분과 맞닥뜨렸다. 그분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 선생님,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순간 내 뇌에 기억을 담당하는 기관이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토록 반갑게 인사를 한다는 것은 내가 언젠가 이분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얼굴 정도는 기억할 텐데, 내 뇌는 내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행동파인 입이 나서야 할 때가 됐다고 말이다. 나는 수없이 많은 날들을 사는 동안 기억력에 오류가 나서 실수한 적은 없는지, 그러니까 내 기억력이라는 것을 믿어도 좋은 것인지, 정말 이 분을 만난 적이 없는데 이 분이 내게 예의상 반갑게 인사를 한 것인지 등을 저울질해보았다. 그러자 문득 내가 눈치도 별로 없고, 눈썰미도 없으며, 어쩌면 안면인식 장애 같은 것이 있는데 지금껏 모르고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대는 내게 질문을 했고, 나는 어서 속히 답을 해야 했다. 만약 이대로 아는 척을 하며 '네, 잘 지냈어요. 선생님은 잘 지내셨어요?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하며 위기를 모면한다면 일단 이 순간은 잘 넘어갈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2번, 3번 마주치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상대가 알아챌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행동파인 '입'에게 어서 나서라고 떠밀었다. 결국 입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다음과 같은 말을 뱉어버리고 말았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혹시 누구... 시죠? 


고민할 때는 천근만근 같은 생각이었지만, 뱉어버리고 나니 시원하다는 생각이 든 순간 상대가 황당한 말을 했다. 


-어머, 선생님, 저 선생님 동영상 매일 보거든요. 제가 요즘 선생님 동영상 강의를 매일 보다 보니까 제가 선생님을 뵀다고 착각을 했나 봐요. 


순간 이 질문을 하지 않고 넘어가서 2번, 3번 아는 척을 하다가 상대가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런데, 선생님, 저 아세요?'라는 질문을 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하니 끔찍했다. 아는 척을 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실례를 무릅쓰더라도 모르는 걸 질문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동영상 강의 속 나와 매일 만나신 걸 실제로 나를 본 것으로 착각하시고,  심지어 서운하다는 표정을 짓던 그분의 얼굴이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영상강의 #학생 #제자 #일방적친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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