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과 거래

번역 원고도 넘겼으니...ㅋㅋㅋ

by 승주연

선물과 거래


2020년에는 지금 돌아보면 어떻게 그렇게 일했을까 싶을 정도로 일을 많이 했다. 보통은 한 해 동안 책을 한 두 권 정도 번역하는데, 작년 한 해 동안 번역한 책만 무려 5권이고, 한국과 러시아를 통틀어서 출간된 책만 해도 3권이다. 러시아 베스트셀러 작가 구젤 야히나의 장편소설이 500페이지, 또 다른 러시아 베스트셀러 작가인 보돌라스킨의 장편소설이 410페이지, 방현석 작가의 중단편집이 295페이지, Why 시리즈 중 세균과 바이러스가 156페이지, 정용준 작가의 ''유령''이 178페이지 정도 되고, 여기에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 대략 352페이지 정도 되니까 총 1800페이지 되는 셈이다. 사실 김애란 작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의 경우는 2019년에 거의 번역을 해놓긴 했지만, 최종 원고는 2020년 1월에 넘겼으니 은근슬쩍 ''두근두근 내 인생''까지 포함시키면서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에 관해 다소 과대 포장해본다. ㅋ


자, 그리고, 어제, 그러니까 2021년 1월 5일에 드디어 작년의 마지막 번역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 넘기기 전까지도 내 머릿속에는 ''과연 오늘 넘길 수 있을까?''라는 부정적인 생각과 ''오늘 무조건 넘거야 해. 넌 할 수 있어!''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싸우고 있었다. 이 생각들이 내 머릿속에서 싸우든지, 장기를 두던지, 훈수를 두던지, 나는 내 머릿속 생각을 신경 쓸 시간도 사치라고 생각하면서 열심히 손으로 타자를 치고, 눈으로는 원고를 훑었다. 물론 원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번역을 하고, 다시 원문과 대조하면서 한 번 더 꼼꼼하게 본 뒤여서 검토해야 할 부분이 많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까지 남는 부분이 가장 까다롭기 마련이다. 눈에 안약까지 넣어가면서 열심히 검토한 후에 나는 출판사에 약속한 2021년 1월 5일 화요일이 6일에게 바통 터치를 하려고 폼을 잡고 있는 순간 즈음에 부랴부랴 출판사 부장님께 번역 원고를 보냈다. 마치 계주에서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서둘러 전달하는 육상선수라도 된 기분이었다. 이젠 출판사 편집부가 바빠질 터였다. 휴우~~~


선물이 필요해!


원고를 넘긴 건 분명 어제였으나, 난 아직 원고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이다. 그도 그럴 것이 '' 번역=생활''이라는 공식을 만들기라도 하겠다는 듯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늘 번역에 매여있었다. 번역 원고는 때론 나를 달래고, 이따금 배달 음식이라는 찬스를 주기도 하며, 나를 조련했고, 결국 원고가 나를 이긴 셈이었다. 물론 책이 나오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며, 책 속에서 작가가 언급한 책도 읽어야 하기에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다소 신선한 머리와 맑은 정신과, 그리고 다소 객관적인 눈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일단 딴 일, 혹은 딴짓, 혹은 나 스스로에게 뭔가 특별한 선물을 줘야 한다.


딸과 저녁에 뭘 먹을지를 놓고 진지하게 고민한 끝에 우리는 오뚜기 짜장면을 먹기로 했다. 오뚜기 짜장면이 선물인 이유는 짜장면을 끓이는 동안은 머릿속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안 할 수 있고, 인스턴트 라면은 빠르고 쉽게 조리할 수 있으므로, 시간이 절약되고, 그 절약한 시간으로 나는 밀린 독서를 하거나, 요 며칠 나의 관심 밖에 있던 거실 바닥이나 내 방바닥을 닦을 수 있다. 그리고 바닥 청소를 하면 바닥뿐만 아니라 뭔가 마음까지도 반짝이는 것 같은 묘한 착각이 들고, 그런 마음은 정신 건강에 아주 좋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오뚜기 짜장면 =정신 건강에 좋은 인스턴트''라는 또 다른 공식이 만들어졌다. 결국 나는 짜장면 2개를 끓여서 딸과 함께 행복에 겹다는, 혹은, 이보다 행복할 수 없다는 미소까지 지으면서 맛있게 먹었다. 딸은 치렁치렁한 머리를 헤어밴드로 묶는 수고까지 자처했다.


''네가 웬일로 머리까지 묶었어?''

''짜장면 먹는데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니까요.''

''그럼, 평소에 밥 먹을 때는 왜 그냥 먹는데?''

''귀찮아서요.’’

''아…’’


일방적인 거래


그런데 문제는 남편이 우리가 라면 먹는 걸 싫어한다는 거다. 하지만, 오늘은 남편이 소셜 커머스에 응모한 경품이 당첨되는 바람에 기분이 좋고, 남편이 올 즈음에는 부탁한 진미채도 만들어놓을 것이다. 이로서 남편도 모르는 우리만의 은밀한 거래가 성사된 셈이다. 아님 말고. ㅋ


그리고, 남편이 집에 와서 우리가 짜장면을 먹은 흔적을 발견한다 해도 짜장면은 이미 우리 뱃속에서 소화가 된 상태일 것이므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맛있는 진미채를 기대하는 것 밖에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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