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기억력...
내 기억력은 조금 독특하다. 남편 말로는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단다. 이를테면, 내가 러시아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남편과 데이트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누가 먼저 만나자고 했고, 어디에서 뭘 했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편과 함께 영화관에서 봤던 영화도 대부분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때 그 일이 굉장히 특이하거나, 그때 만난 사람의 옷차림이 아주 독특하거나, 그때 그 상황이 좀처럼 만나기 힘든 상황 이어야 한다.
이를 테면, 남편과 대화를 하다가 맹장 수술 얘기가 나왔다.
남편: 나 맹장 수술한 거 기억 안 나?
나: 그랬나? 아… 맞다. 기억나요.
남편: 그럼 그렇지. 당신 그 정도는 아닐 거야.
나: 그런데, 내가 당신 맹장 수술한 거 어떻게 해서 기억하는지 알아요?
남편: 그냥 기억하면 기억하지 이유가 있나?
나: 그때 의사 선생님이 당신 내장 지방 좀 심각하다고 그래서 기억하는 것 같아요. ㅋㅋㅋ
남편: 헉.
내 뇌가 무언가를 기억하는 시스템은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은 20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건 아무리 외워도 기억에 어떤 막 같은 게 쳐져 있어서 기억 밖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나는 내 계좌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계좌번호에는 규칙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4 다음에 0이 나오고, 0 다음에 1이 나오고, 1 다음에 6이 나온다고 하면, 이들 숫자 사이에는 아무런 유기적인 연관성이 없다. 아무런 연관성 없는 숫자들의 조합을 내 뇌는 ‘논리 없음’으로 폐기 처분하고, 당연히 기억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내가 우리 집 차 번호를 외우게 된 계기도 조금 특별하다. 아마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차 번호도 못 외웠을 것이다. 상황은 이랬다. 새벽 7시 (나에겐 7시도 새벽이다) 경에 밖에서 누군가가 54**이라는 번호를 외쳤다. 잠결에 나는 ‘도대체 54** 차주는 누구길래 새벽부터 잠을 깨우는 거야?’라고 말했고, 그와 동시에 남편이 번개 같은 속도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날아갔다. 그제야 나는 우리 집 차 번호가 54**라는 것을 알았다. 이런 특별한, 그러니까 가슴에 와 닿는 계기가 없었다면 어쩌면 나는 영원히 우리 집 차 번호를 못 외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난 정말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행복한 지도… 이를테면 몇십 년 전에 내가 아주 아주 어렸을 때 아빠가 퇴근해서 오시면 엄마가 늘 아빠 드릴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시는 걸 알고 있었고, 그런 나는 자는 척하다가 아빠가 오시면 일어나서 같이 저녁을 먹던 기억 같은 것 말이다.
어쩌면 행복했던 기억들이 덜 행복했던 기억들을 밀어내는 생존 본능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행복은 어쩌면 입 속에서 곧 사라질 달콤한 솜사탕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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