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아빠가 내 '아빠'였으면 좋겠다.
요즘 사람들은 수저 이야기를 참 많이 한다. 다이아몬드 수저,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수저가 계급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나의 경우는 흙수저를 갖고 태어났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대구에서 태어났고, 아빠는 버스나 택시 운전을 하셨다. 내가 어릴 때는 트럭도 운전하셨는데, 그럴 때면 아빠는 나를 자주 태우고 다니셨다고 한다. 어렸을 때만 해도 눈도 크고 예뻐서 인형 갔았다나… 믿거나 말거나. 아무튼 외모적으로 봤을 때 나쁜 유전자를 타고나지는 않았지만, 아빠는 술과 친구를 좋아하신 데다 책임감도 많이 부족한 분이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아빠는 그런 분이다.
아빠는 세상 걱정 근심은 혼자 모두 짊어지셔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고, 엄마는 세상 모든 근심을 내려놓고 잊고 사시는 분이셨다. 그런 두 분이 만나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맞고 자란 아빠는 우울한 유년기의 영향으로 인해 자주 울적해하시곤 했다. 어쩌면 울적해지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고, 더 정확히는 스스로를 ‘외로움’ 속에 가두면서 스스로를 측은하게 만드는 것이 본인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아빠의 낙인지도 모른다. 이런 ‘슬픔’은 아빠를 이따금 흔들어놓았고, 그럴 때면 아빠는 술을 드시고, 찰진 욕을 하시면서 아빠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엄마를 향해 허리띠를 휘두르고 자신의 억센 손으로 엄마를 제압했다.
나와 동생을 위해 아빠의 폭력을 고스란히 견디시던 엄마를 보는 것이 무척 견디기 힘들었던 나는 엄마에게 아빠를 떠나시라는 말을 했다. 나 역시 아빠를 견디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나나 동생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힘들었던 것 같다. 내가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도 아빠의 난폭성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대학교 4학년에 재학할 즈음에 엄마는 우리를 떠나셨다. 엄마가 떠나시고, 엄마에게로 향하던 아빠의 날 선 의처증은 나에게로 고스란히 향했고, 나는 매일 아빠로부터 엄마와 내통하는지 추궁을 당해야만 했다.
그때 그 무렵 나는 아침이 유난히 힘들고 싫었다.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고 생각했을 때 아침이 왔고, 나는 그 아침이 무척 야속했다. 그대로 아침이 오지 않고, 아빠도, 아빠의 주사도, 의처증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눈을 떴으면 했다. 물론 다 지난 일이고, 지금 아빠는 그때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지셨지만, 지금도 전화하실 때면 욕을 하시거나 언성을 높이시곤 한다. 하지만, 이젠 안다. 아빠도 힘든 유년기를 거쳤고,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보지를 못 해서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그것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 말이다. 그리고, 늘 자신의 슬픔에 귀 기울이고, 자신에게 술을 사주시는 아빠의 마음은 딱 사춘기에 멈춰 있다고 말이다. 그리고는 한 번씩 억센 바람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폭풍우처럼 휘몰아 칠때면, 사춘기 청소년처럼 돈을 들고 이 도시 저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술과 음식을 사주는 것이다. 아내나 자식을 돌봐야 할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서운하지만, 지금까지도 ‘사춘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여전히 사춘기를 지나는 여리고 여린 소년이라고 생각한다면 측은한 마음이 든다.
오랫동안 풀려고 하던 아주 어려운 수수께끼를 최근에야 풀었고, 마음이 약간은 홀가분해진 것 같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빠가 내게 물려주신 건 수많은 에피소드와 함께 다양한 글 소재가 아닐까 싶다.
*사진은 내가 어렸을 때 찍은 우리 가족 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