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속내...
하루 동안 계획한 번역 원고 작업을 하고 나서 저녁 시간에 오랜만에 여유롭게 읽고 싶은 러시아 역사책을 읽고 있었다. 이때 딸이 오더니 내가 번역한 책을 읽고 싶다고 했다.
딸: 엄마, 엄마가 번역한 책 제목이 뭐죠?
나: 최근에 출간된 거?
딸: 네.
나: 비행사. 보돌라스킨이라는 작가가 썼어.
딸: 그 책 예쁘던데요? 저 그 책 읽어볼래요.
나: 지금 10시가 넘었어. 자야지. 아빠 올 시간도 다 됐고.
딸: 그래도 책 읽고 있으면 뭐라고 안 하실걸요?
나: 아니, 네가 읽어야 할 책도 많은데 왜 굳이 그 책을 읽겠다는 거야? 그 책 너한텐 어려워.
딸은 올해 12살이고, 내가 번역한 책은 물론 어른들을 위한 소설이다.
딸: 그래도 읽고 싶어요.
나: 알았어, 읽어.
딸은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침대용 책상과 독서대를 가져왔다.
나: 아니, 책을 읽는데 뭐가 이렇게 많이 필요해? 그냥 읽으면 되지. 거참 요란하네.
딸: 이렇게 해야 잘 읽힌단 말이에요.
나: 알았어. 읽어.
역자 약력을 읽으면서 딸이 묻는다.
딸: 엄마, ‘두근두근 내 인생’이 뭐예요?
나: 엄마가 러시아어로 번역한 소설 제목이야.
딸: 달콤한 나의 도시는요?
나: 그것도 엄마가 러시아어로 번역한 소설 제목이야.
딸: 엄마가 번역한 책 많네요.
그러더니 딸은 정말로 소리 내서 읽었다. 그것도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채로 말이다.
딸: ‘나의 딸에게’라고 쓰여있네요?
딸은 이 말을 하면서 감동 가득 담은 눈빛을 나에게 보냈다.
나: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책은 러시아 작가가 썼고, 엄만 한국어로 번역했을 뿐이야. 그러니까 ‘딸에게’라는 것도 러시아 작가가 쓴 걸 엄마가 한국어로 옮긴 거야.
딸: 아, 그렇군요.
딸의 얼굴에서 실망하는 듯한 표정이 살짝 스쳐 지나갔다.
딸: 엄마, 서문이 뭐예요?
나: 작가가 책의 앞부분에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은 글이야.
딸: ‘세상에는 빅 히스토리와 스몰 히스토리가 존재합니다.’ 빅 히스토리는 뭐지? 스몰 히스토리는 또 뭘까?
나: 어렵다고 했잖아.
딸: 나중에 네이버에 검색해봐야겠다.
이렇게 딸은 내 독서를 이런저런 질문으로 방해하더니 아빠가 오면서 아빠가 틀어준 만화영화에 눈과 정신을 빼앗겼고, 언제 책을 읽었냐는 듯 책은 민망하게 딸의 앞에서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내가 번역하는 책들은 주로 어른들을 위한 소설이고, 그 안에는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아이가 읽기에는 야한 내용들도 많아서 나는 되도록 아이에게 내가 번역한 소설은 더 커서 읽으라고 말한다. 때론 이렇게 호기심이 발동하면 읽겠다고 고집을 부려보지만, 금세 본인이 좋아하는 만화 영화나 더 재미있는 것들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을 빼앗기곤 한다.
집에 있는 시간은 많지만, 번역과 다른 업무에 시달리느라 딸과 잘 못 놀아주는 나를 딸은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또 한편으로는 무척 자랑스러워한다. 그런 딸에게 늘 미안하고 고맙다.
*사진은 딸이 찍어준 역서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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