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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Aug 17. 2021

네임펜은 잘 안 지워진다

'창의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는 아이에게 벽과 바닥을 내어 주라'

브런치 이웃 작가님 글에서 읽은 대목이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알면서도 못하는 고충이 있다.


내 집이면 아이가 낙서를 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겠는데 빌려 살고 반납해야 하는 전셋집이다 보니 아이에게 낙서를 허락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감정과 욕구의 절제가 힘든 어린 딸에게 "벽에 절대 낙서하면 안 돼."라는 주문을 자주 했었다. 아빠의 말을 듣고 아이가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지 모르지만, 아빠로서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동안 여러 집을 거쳐왔다. 그중에서 바로 이전 집의 경우가 가장 조심스러웠다. 애들 교육 때문에 세를 놓고 서울에 가 있는 집이었는데, 처음 아파트를 보러 갔을 때 층수도 적당하고 방이랑 거실 한쪽 벽면을 타일로 모자이크처럼 이쁘게 인테리어를 해 놓아서 마음에 쏙 들었다. 공공기관 지역본부장이 이 집을 4년간 사택으로 임차해 살면서 방 하나랑 거실만 쓰고 요리도 안 해 먹었는지 아주 깨끗하게 유지된 상태라 좋았다.


이 집에 들어간 우리 세 가족은 만족하며 지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5살 아이가 언제 펜을 들고 벽지도 아닌 돈 들여 인테리어 한 벽면에 예술혼을 불태울지 몰라서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도 딸아이가 얌전해서(?) 그랬는지 낙서할 칠판이랑 노트를 사 줘서 그랬는지 집주인이 간파하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스크래치만 두어 개 남겼을 뿐 대참사는 없었다.


그리고 올해 초 현재 사는 집으로 이사했다. 이번 집은 이전 집과는 정반대였다. 서울 사는 집주인이 투자 성격으로 집을 사서 곧바로 임차했는데, 집 내부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벽지도 오래되었고 못을 박았었는지 구멍 자국도 많지만 우리도 2년 후에는 새 집으로 이사 갈 예정이라 돈 들일 생각이 없었다. 혹여 아이가 낙서를 해도 '나갈 때 도배해 드리면 되지'라고 마음 편히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그렇게 5개월이 흐른 어느 날, 한 번은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드디어 발생했다. 그런데 벽과 바닥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왔다.


저녁 시간 아내는 주방에서 설거지하고 나는 거실에서 TV를 보며 빨래를 개고 딸아이는 무슨 맘이 들었는지 안방에서 옷 정리를 하겠다고 혼자 들어가 있었다. 잠시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아내가 설거지를 마친 뒤 아이 뭐하나 궁금해 조용히 방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문 앞에서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여보. 이리 와서 이 것 좀 봐봐."


아내가 고개를 돌려 나를 조용히 불렀다. 뭔가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했다. 안방으로 조용히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봤더니 딸아이가 옷을 조금 개고 난 뒤 넣을 자리를 구분하여 표기한다고 서랍장 칸칸마다 삐뚤빼뚤 글씨를 적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굵은 네임펜으로 말이다. 수납공간이 부족해 이사하면서 새로 산 서랍장에 거침없이 쓰고 있었다.


서랍장에 글씨를 쓰고 있는 딸아이


제일 윗 칸에는 '근난 서윤이랑 엄마 비밀장소 아빠는데(아빠는 열어봐도 괜찮다는 뜻)'라고 썼고, 두세 번째 칸은 '서윤이랑 엄마옷', 제일 아래 칸은 '겨울옷이랑 서윤이 수영복'이라고 써 놓았다. 한글을 제법 잘 읽지만 쓰기는 아직 서툴러서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적다 보니 양말은 '얄말'로 속옷은 '소곳'이라 써서 나중에 고쳐 주었다.  


처음 봤을 땐 웃는 게 웃는 게 아닌 상황이었지만, 조금 지나고 나니 이 또한 별일이 아닌 일이 되었다. 이야기할 거리를 남긴 딸아이 덕분에 우리 부부는 두고두고 떠올릴 이야기를 하나 더 갖게 되었다. 볼수록 낙서라기보다는 정보에 가까워 보인다. 이제 시작은 했고 또 뭔가 시도할 것 같은데 어찌 막겠는가. 그래도 딸아이에게 한 가지는 말해줬다. 네임펜은 잘 안 지워진다고. 진짜로.




<사진출처: 모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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