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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Mar 19. 2022

곰손이지만, 편지에 그림을 그린다

요즘 나는 매주 한 통씩 딸아이에게 손편지를 쓴다. 이번 주까지 총 15통의 편지를 썼으니 어느새 15주가 흘렀다. 이제 편지 쓰기는 나의 위클리 루틴이 되었다. 매주 놓치지 않고 해야 할 과업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와의 추억 하나 더할까 싶어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먼저 발을 뺄 수 없는, 계속 나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이가 아빠의 손편지를 무척이나 기다리기 때문이다. 편지지 위에 그린 그림 하나가 촉매 역할을 했다.


나는 시작부터 편지지 위에 횟수를 적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편지 식으로. 어디까지 쓸지 체크해두고 싶었다. 일곱 번째 편지까지는 거의 글자와 숫자로 횟수를 적었다. 그러다가 여덟 번째 편지에서 숫자 ‘여덟’이 눈사람 모양이라 엉성하게나마 눈사람 그림을 글자 옆에 그려 보았다. 그랬더니 아이가 그림에 눈길이 갔는지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는 다음은 아홉 번째 편지이니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신비아파트의 구미호를 그려 달라고 주문했다.


난감했다. 곰손 아빠에게 그림 주문이라니.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으니깐. 그래도 어쩌랴. 아빠는 아이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인걸. 일단 해 보기로 했다. 아니 해야 했다. 인터넷에서 신비아파트 구미호를 검색했다. 수많은 그림 중에서 도전해 볼 만한 그림을 하나 정하고 똑같이 그려보기로 했다. 주중에 플러스펜으로 여러 번 연습하고 그렸는데 다행히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다.


평가받는 마음으로 금요일 밤에 집으로 갔다. 기다리던 딸에게 구미호를 보여줬더니 아이가 귀엽다고 기뻐했다. 그리고 “아빠 다음 주에는 뭐 그려 줄 거야?"라고 기대하며 매주 금요일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주중에 통화할 때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물어보지만 비밀이라 미리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렇게 한 주는 못 말리는 짱구도 그렸고, 신비아파트 도깨비 신비랑 금비도 그렸고, 엉덩이 탐정과 겨울왕국 울라프도 그렸다.


편지에 그림까지 끝내려면 시간은 이전보다 몇 배나 더 걸린다. 수요일을 넘기면 마음도 급해진다. 그럼에도 하면서 요령이 생긴다. 내가 하는 방법은 이렇다. 인터넷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만화제목 + 색칠공부를 검색한다. 이미지 중에서 입체적이지 않은, 그나마 쉬워 보이는 그림을 택해 따라 그린다. 어렵게 느껴질 땐 유튜브에서 '색칠공부' 영상을 찾아본다. 이면지에 그림을 몇 번 그려보고 준비가 되면 편지지를 놓고 그린다. 만화 캐릭터라 머리가 잘 그려지면 나머지는 좀 틀려도 괜찮아 보인다.


편지지는 여전히 다이소에서 사고 있다. 이전에는 만화 캐릭터가 인쇄된 1000원짜리 편지지를 샀다. 디즈니 캐릭터, 애니메이션이 인쇄된 편지봉투로 아이 관심을 끌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500원짜리 편지지를 사서 쓴다. 편지봉투에 아무 인쇄가 되어 있지 않고 면이 맨들맨들해 그림 그리기에 수월하기 때문이다. 가격으로는 500원 절약이지만, 그리다가 실수를 많이 하는 경우에는 편지봉투 네 개를 한꺼번에 홀라당 다 써 버리기도 한다.


편지 쓰기를 하면서 장점은 내 마음이 뿌듯해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흘러가는 건 아닌지 싶을 때도 있다. 딸아이가 편지를 기다리는 것도, 편지를 받고 기뻐하는 것도 맞는데 그림만 좋아하고 내용에 관심이 덜한 것처럼 느껴져서다. 편지봉투 그림을 보고서 곧바로 편지통에 넣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빠가 정작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그 속에 있는데 말이다. 아내 말로는 주중에 편지통에서 다시 꺼내 읽어보기도 한다니 그러려니 한다. 설령 당장은 그림에 더 관심이 간다고 하더라도 언젠가 아빠의 글도 가닿겠지 하면서 나는 다음 편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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