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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May 08. 2022

끝말잇기는 어려워

어머니 병문안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내가 운전하고 나는 아이와 뒷좌석에 앉았다.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걸 보고 잠시 눈 붙이고 일어났더니 천안 IC 부근이었다. 도로가 꽉 막혀 우리 차도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어린이날 선물로 서점에서 고른 MBTI 만화책을 보고 있었는데, 자기 자리 쪽으로만 내리쬐는 햇빛이 뜨거웠던지 더 이상 책을 못 보겠다면서 내게 끝말잇기를 하자고 했다. 아이가 하자는데 해야지. 아이가 먼저 첫 단어를 불렀다.


딸: 콘트라베이스

아빠: 스시

딸: 시인

아빠: 인도

딸: 도레미

아빠: 미술

딸: 술병 (술 먹고 난 병)

아빠: ...................


미술을 얘기했을 때 왠지 '아차' 싶었다. 술과 관련된 단어가 나올 게 예상됐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술병이 다음 단어로 나왔다. 그래서 아이에게 "너 술병이 뭔지 알아?"라고 물어봤더니 내 얼굴을 보면서 "토하고 머리 아프고 막 그런 거잖아."라고 답하는 게 아닌가. 예전에 처갓집 모임에 갔다 와서 힘들어했던 모습을 아이에게 딱 한 번 보인 적이 있었다. 이래서 어른들이 아이 앞에서는 찬 물도 못 마신다고 했구나. 속으로 찔려하고 있는데 앞자리에서 운전하던 아내가 "아이고. 좋은 거 가르치십니다."라며 핀잔을 줬다.


나는 다시 대화를 돌려 "병정"을 외쳤고 아이는 “정리”를 말하며 끝말잇기는 또다시 이어져갔다. 그렇게 한참 하다가 딸아이 순서에 "표범"이 나왔고, 내가 "범고래"를 말했더니 "범고노"로 하면 안 되겠냐고 해서 옥신각신 하다가 끝말잇기는 끝이 났다. 해 보면 알지만 아이와 끝말잇기를 하려면 머리를 상당히 써야 한다. 아이 수준에 맞는 단어를 찾아야 한다. 아이에게 외통수 일격을 가하면 안 된다. '눈치 없는 아빠'가 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쉽게 이겨서도 안 되고 설렁설렁해서도 안 되는 아이와의 끝말잇기. 재밌지만 또 어렵다.




<사진출처: 아는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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