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피를 수혈하다’라는 말이 있다. 새로운 인물을 영입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신문의 정치면이나 경제면에서 기사를 종종 접할 수 있다. 그런데 혈액원에 근무하고 나서부터 나는 이상하게도 ‘젊은 피를 수혈한다’라는 표현을 들을 때마다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젊은 피라는 게 뭐지? 젊은이의 피를 말하는 것인가? 갓 채혈한 혈액을 말하는 것인가? 해마다 250만 명 내외의 국민들이 헌혈한다. 헌혈에 참여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10대와 20대이니 나이로 치자면 수혈자들은 젊은 피를 받을 확률이 높다 하겠다. 그렇다면 병원은 혈액원에 젊은 피를 요구할까? 사실 병원은 혈액원에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혈자의 연령과 성별을 알 수도 없을뿐더러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들은 이왕이면 보유기간이 넉넉한 혈액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
의학적으로 젊은 피가 사람의 몸에 활력을 가져다주는지는 전문가가 아니라 알지 못하지만, 우리가 일하는 조직에서만큼은 젊은 에너지가 꼭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다. 조직은 남아도 우리는 언젠가 떠나야 하기에 미래의 주역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 전공수업 때 배운 것 중에 30년 이상 영속하는 기업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경쟁사회에서 회사를 만들어 성장시키는 것도, 유지시키는 것도 어렵다. 오래도록 남아 있다는 건 아직도 사람들에게 팔린다는 의미이고 대단한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하는 대한적십자사는 올해 120년이 되었다. 30년도 어려운데 120년이라니. 그렇다면 무엇이 이 조직을 살아있게 한 힘이었을까? 나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시대마다 비슷한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회사가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다.
며칠 전 한 선배가 공로연수에 들어갔다. 선배는 직장생활 34년을 근무했다. 나와는 12년 연차가 나는 까마득한 선배님이시지만 내가 입사하였을 때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고 오랫동안 가까이에서 함께 해서 그런지 떠난다고 하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돌이켜 보니 나도 한때는 젊은 피였다. 선배들 따라다니면서 일도 배우고, 선배들이 사 주는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어울려 지냈는데 이제는 그런 선배들이 하나씩 회사를 떠나고 가장 뒷줄에 서 있던 내가 어느새 과거의 선배들 자리에 서 있다. 얼마 전 선배 환송식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인원이 많아 첫 줄에 의자를 깔고 나머지는 뒤에 서서 사진을 찍는데 나보고 앞줄에 앉으라고 해서 어색해 죽는 줄 알았다. 늘 내 위치는 뒷줄 어딘가였는데 연차도 차고 직책도 있어 제일 앞으로 오게 되었다는 게 나로서는 적응되지 않는다. 세월이 벌써 이렇게나 흘러갔나 싶었다.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들어오는 사람도 있다. 4월 1일 신입직원이 새롭게 왔다. 젊은 피가 수혈된 것이다. 요즘은 채용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블라인드 채용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지원자에 대한 사전 정보가 없다. 사는 지역, 졸업학교, 가족사항 등 지원자의 인적사항 아무것도 알지 못해 오히려 회사가 백지다. ‘좋은 친구가 와야 하는데’하는 기대를 선배들은 많이 갖는다. 첫 출근한 신입직원을 만나고 아직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잘할 것 같다는 말을 내게 살짝 얘기해 주고 간다. 보는 눈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도 내가 처음 근무했던 기관으로 다시 발령 나서 돌아오고 맞이하는 첫 신입이라 각별함이 있어서 별도 교육자료를 만들었다. 회사 짬밥 21년 차 선배가 본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몇 주간 자료를 모았고, 1시간 분량 파워포인트를 만들었다. 후배 팀장이 곁에 와서 내가 만든 걸 쳐다보길래 이런 얘기를 할 거라고 슬라이드를 살짝 넘기며 설명해 줬다. 그랬더니 콘텐츠가 좋다면서 작년에 들어온 자기 부서 직원도 같이 듣게 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에서 교육이라면 교육이고 하고 싶은 얘기라면 얘기인 그런 말을 했다. 나는 X세대고, 그들은 MZ세대라 혹여 내용이 꼰대처럼 다가가지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준비를 많이 하셨다는 게 느껴져요.”라고 다행히 두 사람 모두에게 괜찮게 받아들여진 것 같아서 나도 만족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ance)라고 말했다. 인생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선택의 연속이라는 의미다. 왕년의 젊은 피였던 나도 그랬지만 근래에 들어온 후배들에게도 대한적십자사 입사는 ‘그 누구의 선택’도 아닌 ‘당신의 선택’이었음을 강조했다. 그 선택이 후회되지 않기를 바란다. 늘 마음속으로 ‘다 잘하고 있어. 나만 잘하면 돼’라고 하면서 걸어왔지만, 이제는 후배들이 자리 잡도록 곁에서 지원하는 일도 나의 몫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