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십자 표장을 한 병원선
적십자 표장은 두 종류다. 보호표장과 표시표장. 보호표장은 제네바협약이 정하는 보호 대상과 물체를 나타내는 표지다. 가급적 크고 눈에 띄어야 한다. 표시표장은 적십자사와 관계있는 사람, 물건 등을 표시하기 위한 표지다. 작게 만들고 명칭과 약칭을 함께 기입한다.
보호표장은 원칙적으로 군 의료활동을 식별하기 위한 표지다. 군대 의무대 구급차량에는 커다란 적십자 표장이 표시되어 있다. 한 번은 에버랜드에서 퍼레이드를 구경하고 있는데 머리 위로 적십자 표장이 표시된 의무헬기가 지나갔다. 모두 보호표장이다. 이 밖에도 하늘 위 비행기와 바다 위 병원선에서도 적십자 표장을 만날 수 있다.
오늘은 현충일. 표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된 만큼 6.25 전쟁 당시 의료지원국으로 참전했던, 적십자표장이 큼지막하게 박힌 덴마크의 병원선 '유틀란디아호(JUTLANDIA)'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국가보훈부가 정한 2024년 1월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됐다.
1950년 6월 27일 유엔이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결의하자, 중립국 덴마크는 의료지원을 제공하기로 결정하고 유엔 회원국 가운데 가장 먼저 지원의사를 통보했다. 덴마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국경을 넘을 때 저항할 힘이 없어 쉽게 함락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변방의 약소국이 냉전의 소용돌이에 희생되는 모습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려 지원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덴마크는 자국 적십자사로 하여금 뉴욕을 왕복하던 상선 유틀란디아(Jutlandia)호를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한국에 파견토록 조치했다. 정부가 병원선을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덴마크에서 가장 큰 기업이었던 동아시아 선박 회사가 나섰다. 유틀란디아호는 회사가 소유한 가장 큰 배였다고 한다.
뉴욕을 향하고 있던 유틀란디아호는 자신이 태어났던 덴마크 낙스코우 조선소로 급히 방향을 틀었다. 낙수코우 조선소에서 수리에 들어간 지 두 달 만에 유틀란디아호는 수술실 4곳과 356개 병상, 치과 수술대와 X선 장비까지 갖춘 당시로는 최첨단 병원선, 해상 종합병원으로 재탄생했다.
덴마크 적십자사는 한국에 파견할 의사와 간호사를 엄선하고 의료장비와 보급품, 의료진과 교육훈련 등 파견준비를 서둘렀다. 총지휘관은 병원선 내 제반업무와 유엔군사령부와의 긴밀한 유지업무를 맡고, 병원장은 의료업무를, 선장은 항해와 안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30명의 간호사들은 지원한 200명 가운데 경험이 풍부한, 평균 나이 40세로 선발하였다.
8,500톤급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1951년 1월 23일 덴마크 적십자 단장이었던 해머리히 사령관의 지휘 아래 코펜하겐을 떠나, 5주가 넘는 항해 끝에 3월 7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유틀란디아호는 1회 8개월로 참전기간을 정해, 매 8개월마다 근무교대와 의약품과 기자재 등 획득을 위해 본국으로 귀환할 것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총 3차례에 걸쳐 참전하였다.
해머리히 함장을 제외한 나머지 187명의 승무원들은 전부 민간인이었다. 당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남한에는 변변한 의료시설이 없었고, 그나마 군인들로 가득 차 민간인들은 치료받을 곳이 없었다. 가난하고 병든 한국인들과 전쟁고아들은 승무원이 배에서 내리기를 기다렸다.
의료진은 적십자정신에 따라 민간인까지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인치료에 방해된다며 유엔 사령부는 승인하지 않았다. 해머리히 함장이 거듭 설득한 끝에 군인이 타면 병실을 비워주는 조건으로 파견 4개월 만에 민간인 치료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틀란디아호는 주로 부산항에 정박하고 있었으나 상황에 따라서는 적의 포격 위협에도 불구하고 전방지역에 위치한 항구로 이동하여 적극적인 의료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병원선은 환자 치료 못지않게 등화관제 문제로 상당한 고충을 겪었다.
적십자 표시 등을 소등하면 제네바협약에 의한 병원선으로서의 보호를 받을 수 없고, 반대로 점등을 하면 아군 군사작전을 노출시킬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선은 이 문제를 유엔군 당국과 협의하여 안전한 항구에서는 등화관제를 해제하고, 그 밖의 경우에는 소등하는 데 합의하였다.
참전한 지 4개월이 지난 1951년 7월 24일, 유틀란디아호는 승무원 교대와 의약품, 기자재 수령을 위해 부산항을 출항했다. 제2차 팀은 1951년 9월 29일 덴마크를 출항, 11월 16일 부산항에 두 번째 입항하였다. 2치 파견 초기 병원선은 전황의 추이에 따라 지역을 옮겨 가며 전상자를 치료하였다.
휴전협상의 영향으로 전쟁이 교착상태에 이르자, 유틀란디아는 1952년 3월 29일 다시 덴마크로 향했다. 환자 후송을 위해 갑판에 헬기장을 설치하고, 헬리콥터 1대를 탑재시켰다. 진료과목도 내과, 외과, 안과, 신경외과, 치과로 확대되었다.
1952년 9월 20일 유틀란디아호는 덴마크를 출발하여 11월 20일 전선에 근접하여 의료지원하기 위해 인천에 입항하였다. 병원선은 열차, 차량뿐만 아니라 병원선의 헬리콥터가 전방고지까지 나가 후송한 응급환자까지 많은 전상자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유틀란디아호는 보유하고 있던 의약품과 의료기자재들을 유엔한국재건단을 통해 민간병원에 기증했고, 1953년 8월 16일 인천시민들의 뜨거운 환송을 받고 인천항을 떠났다. 파견기간 동안 진료환자는 부상장병 4,981명을 비롯해 민간인 1만 명이 넘었다. 덴마크 의료진은 정전 이후에도 스웨덴, 노르웨이와 함께 긴밀히 협조하여 국립의료원의 설립에 참여하는 등 큰 공헌을 하였다.
고국으로 돌아간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여객선으로 다시 개조해 덴마크와 태국 방콕 항로에 투입됐다. 그리고 1965년 수명을 다하고 해체됐다. 유틀란디아호는 대한민국을 떠났지만, 덴마크는 전쟁 중에 대한민국과 나누었던 우정을 잊지 않았다. 1981년 5월 1일 유틀란디아호의 근무자들은 유틀란디아 동지회를 결성하였고, 1990년 5월 코펜하겐 항구에 대한민국 재향군인회의 지원을 받아 참전기념비가 세워졌다.
1986년에는 덴마크 가수 킴 라르센이 노래 유틀란디아를 발표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의 인도주의 정신을 찬양한 노래로, "그때 한국에 전쟁이 있었지. '유틀란디아'라는 이름의 배가 전쟁에 참여했어. 병원으로 쓰기 위해 항구를 나섰지" 가사가 들어가 있다. 킴 라르센은 이 곡으로 단번에 덴마크 국민가수를 거듭나게 되었다. 덴마크에서는 이 노래와 함께, 유틀란디아호의 역사에 대해 가르친다고 한다.
유틀란디아호는 999일 동안 한국에 정박하며 인도주의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전쟁에 파견되어 부상병과 민간인을 치료하고, 전쟁 후에도 한국의 의료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지원했던 그들의 희생정신과 노력에 감사함을 느낀다.
<참고, 인용문헌>
1. 국가보훈부 블로그 <6.25 전쟁 유엔참전국 이야기 3편, 의료지원국 덴마크의 병원선 유틀란디아호>
2. <인터뷰> 전쟁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 자원해 의료선 오른 그들, 국방일보, 2015. 6.30
3. <6.25 특집 - 병원선 유틀란디아의 기억>, KBS뉴스, 2010. 6.27
4. 6.25 전쟁과 UN군, 국방부 국사편찬연구소, 2015, p381~389
5. 한서대학교 국제인도법연구소 김혜남, <적십자 정신과 실천>,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