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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난 민원인

by 포데로샤


좋은 소리만 듣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죽하면 월급의 반은 욕먹는 값이라는 말이 있겠는가. 이건 직장상사와 부하직원 사이의 쪼고 쪼이는 관계에서만 통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일하다 보면 “고생한다.”, “수고한다.”, “좋은 일 한다.”라고 따뜻한 말을 건네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지만 역으로 입장 다른 사람이 하는 거친 말로 상처받는 경험을 겪을 수도 있다. 민원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말이다.


전화는 불만을 표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민원이랄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세 달 전 느닷없이 전화로 욕먹은 일이 한 번 있었다. 적십자 회비모금 기간이었으니 날아온 회비용지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을까. 상황은 이랬다. 파티션 너머 서무담당 자리의 전화벨이 울렸고, 직원 L이 전화를 받았다. “사랑은 실천입니다. 총무팀 000입니다”라고 사내 멘트로 고객에게 친절하게 응대했는데 헌혈 얘기를 잠시 꺼내다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좀 지나 전화가 다시 울려서 받았더니 이번에는 상대가 직원 L에게 기분 나쁜 신음소리를 의도적으로 내더니 다시 끊었다. 민원인이 먼저 연락한 걸 안 받을 수도 없고 일방적으로 끊을 수도 없는 노릇. 흔한 일은 아니지만, 돌아가는 모양새가 작정하고 저어~질 장난 전화를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상한 전화가 자꾸 들어오는데요.”


직원이 맞은편 앞자리 선임 L에게 말하는 걸 자연스럽게 엿듣게 되었다.’ ‘안 되겠다. 다음 전화는 내가 당겨 받아서 정리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들었다. 그래서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통화를 끌어와서 인사 멘트를 했는데, 상대는 다짜고짜 "야이, 개**야."라며 나에게 속사포 쏘듯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노가드 상태로 강펀치를 맞아서 살짝 어찔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짬이 괜히 짬인가. 곧바로 냉정을 되찾은 후 계속 들었다. 젊은 남자가 뭔가 불만이 쌓여 전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뿐 내 말은 도통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1분쯤 욕을 직살나게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사무실로 통화를 한 번 더 했는데, 다른 팀장의 목소리에는 위압감을 느꼈는지 아무 말 안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게 그가 사무실에 한 마지막 통화였고, 욕을 먹은 사람은 유일하게 나뿐이었다.


‘지사로 다시 돌아왔구나.’


뜬금없이 욕을 먹은 것이지만 사실 한때 회비모금 업무를 했을 적에는 전화로 욕하는 사람들을 한 번씩 접했다. 지금은 다르지만, 과거만 해도 회비모금 지로용지가 세대주에게 일괄 나갔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적십자회비 지로용지를 알고 계셨지만, 갓 세대주가 된 분들이나 마을 단위에서 기금으로 회비를 납부해 개별 용지를 받아보지 못한 분들은 용지를 받고서 "이게 뭐냐?", "반드시 내야 하느냐?" 같은 질의 성격의 전화를 많이 주셨다. 충분히 설명해 드리면 회비를 내든 아니든 대부분 잘 끝나는데, "왜 이런 걸 보내느냐?"라고 항의하는 분들은 애초에 설득이 어려웠다. 그런 분 중에 심한 경우 통화 중에 욕을 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었다.


이상하게 욕을 하는 사람들은 남자들이었다.(내 경험상) 나보다 약한 사람이라고 판단해서 강경하게 나가는 것인지 남자인 내가 아닌 여직원이 전화를 받을 때 더 심하게 표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부서 동료 여직원에게 “전화를 받아보고 중간에 낌새가 안 좋으면 나한테 넘겨요.”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렇지만 언제 그런 막말이 날아올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갑작스레 욕이라도 먹게 되면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순간 멍하고, 반나절은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욕먹은 여직원은 통화 후 화장실에 가서 울고 눈이 부은 채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이곳 적십자도 엄연히 고객이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에 민원과 응대는 반복된다. 접수되는 민원은 기관별로, 사업별로 조금씩 다르게 들어온다.


얼마 전 퇴직하신 J처장님께서 재직 중에 만났던 별난 민원인 얘기를 페이스북에 올리셨다. 그때 같은 기관에서 근무했고, 이 건이 워낙 유명해서 기억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출구 없는 꽉 막힌 항의가 아니었나 싶다.


당시 지사가 신사옥으로 이전한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때 건물 외벽에 K회장님께서 직접 숙고해서 '국민의 눈물을 닦아 줍니다 ^^'라는 문구를 정하고, 태양광 시설물도 가리면서 지나가는 차나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큰 간판을 붙였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인도주의 활동을 통해 국민에게 더 다가가겠다는 상징적인 메시지였다. 그런데 퇴직 공무원 출신의 한 민원인이 이 표현에 문제를 제기하셨다. 니들이 어떻게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느냐며 이 표현은 잘못되었다고 따지셨다. 건물 앞 큰 도로를 지날 때마다 거슬리니 간판을 떼라고 요구하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전화로 항의하시다가, 그다음은 사무실로 찾아오고, 기관장도 만나고 가셨다. 지사에 얘기해 봐야 고쳐지지 않는다고 생각하셨는지 본사에도 연락해서 항의한 것으로 안다. 그래서 지사에서는 표현을 가지고 계속 문제 삼는 이 민원인에게 답변하기 위해 인근 대학 국어과 교수님께 검토를 받아서 답변을 드리기도 했다. 민원인은 꽤 오랜 기간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셨던 것 같다. 그 경직된 사고에 모두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으니, 이 민원이 내가 기억하는 별난 민원이다.


회사가 존재하고 업무가 돌아가는 한, 민원도 들어온다. 별난 민원에 대한 처리도 적십자에서 일하고 싶은 당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업무 중에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 민원에 너무 지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이 다 나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시라. 모든 사람의 신뢰를 얻는 일은 아무리 적십자라도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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