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은 사실이고, 약간은 농담이고,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우리의 관계를
아내는 늘 나의 주인공이며, 나는 조연이다. 글을 쓰려다 보니 낯간지런 소리를 피할 수 없어 읽는 이에게 송구한 마음 없지 않다.
연애 때부터 아내는 나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그녀에게 난 나름 참 멋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제 눈에 안경이랄까, 머쓱해하는 모습 하나까지도 용납이 되고 사랑스러운 바에야 어떤 항목이 예외일 수 없었다. 내가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은, 교회 대학부 찬양 리더로 기타를 치며 순서를 끌어가던 자리에서다. 군을 제대하고 바로 찾아온 교회에 나는 이미 두 해 째 다니면서 제법 리더인 양 하고 있었고, 그때까지 별다른 관심이 없던 그녀가 어느 날 갑자기 종교도 좀 가져보는 것이 교양 있어 보일까 하여 발걸음을 교회로 옮긴 첫날이었다. 그녀는 대학생답게 뭔가를 배우고 싶어 했고, 연극을 보러 다니며 문화인의 소양을 갖추자 했고, 대학 교정 잔디에서 기타 치며 노래를 부르던 "분위기" 있는 여성이었고, 모자란 종교적 소양을 쌓으러 그날 교회에 발걸음을 옮긴 날이다.
"눈이 부셨다"는 나에 대한 극찬의 첫인상은 나중에 안 그녀의 고백이다. 와우~ 내가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눈부신 사람인 적이 이때 말고 또 있을까. 늦깎이 크리스천에서 그날 단연 1등 크리스천으로 순간이동을 했던 아내다. 기도도 모르던 사람이, 바로 "저 남자를 주세요"라는 제목의 기도를, "답을 받을 때까지" 하기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한 가지 기도제목을 가지고 답을 받을 때까지 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상 드물다. 받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을 놓고 우격다짐으로 "주세요"를 외칠 뿐, 응답이 느린 기도에 끝까지 처음과 동일한 열정으로 인내하는 이는 많지 않다. 작은 기온차에도 시들해지는 들풀로 크리스천이 비유되기도 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녀는 과연 해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 들면서 누군가의 공공연한 기도의 객체가 되어버린 나는, 교회에 가는 길에 그녀를 만나기도 했고, 도서관 행 버스에서 확률 100대 1 쯤의 순간 만남 등으로, 내게 일어나는 비상식적 현실에 놀라게 된다.
부끄럽지만, 나는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는 평이다. 잘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착하게 생긴 외모로, 노래도 곧잘 하고, 기타 드럼 등 악기를 만질 줄 알았고, 사람이 사근사근 친절했다. 이 친절이란 게 모든 여학생에게 실천되다 보니,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여러 사람 혼돈케 한다. 러브레터를 받고, 생일엔 생각지도 않은 선물이 당도하기도 했다.
이런 풍경과 소문에 대해 내색 없이 지내기가 어린 아내에게는 쉽지 않았을 텐데, 사랑은 사람을 성숙시키는 힘이 있어서인지 꾸준한 기도로 그녀는 신앙이 단련되어 갔다. 어떤 한 인간이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가는데 그 기도제목의 핵심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천국에서 이미 상이 클지도 모른다.
아내는 청년부 안에서 나를 두고 치르던 경쟁을 다 누르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이라는 종착역에 당도한다. 이것은, 그녀에겐 묵직한 기도의 응답이었지만, 나에게도 행운이었다. 그녀의 기도 덕분에 결혼했다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내에게 대한 사랑이 모자라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한 기도와 노력의 결과물이고, 지금도 친구 같고 연인같이 지내는 아내다.
아내가 여태껏 가졌던 나에 대한 애착은 젊은 날의 이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고 있다. 애착이 지나치면 소유욕으로 커지는데, 아내는 여태껏 서로의 사랑에 방해되는 요소를 용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회사 일의 연장선인 공적 모임으로 야유회에 참석해야 할 때, 타고 가는 버스 안에서 여직원과 합석한달지, 자가용 옆자리에 나이 또래의 여 성도를 동승시키는 행위는 강력 처벌을 받았다.
나의 활동 영역은 위축되었고 관계의 제한성이 초래되었다. 의도가 전혀 불순하지 않은 만남, 대화, 접근도 색안경 저편에서 불온서적으로 해석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젊고 젊던 결혼 생활의 시간들은 불편하게 채워져 갔다.
이민을 오고 이색적 환경에서 또 수많은 만남과 관계를 경험하면서, 아내의 이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어 갔다. 목을 조이던 끈이 느슨해졌지만,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닐 것이다. 함께 어려움을 겪고, 세월의 쓴 맛을 나누고, 서로에 대한 오해로 미움의 칼날을 향하기도 했던 시간이 '삶'이라는 파도를 이해하게 만들었다.
그런 관계로 이제는 되돌아와 앉은 어여쁜 누이처럼, 아내는 차원이 높은 말을 하곤 한다.
"이젠 오빠가 행복하다면, 내가 죽었을 때, 재혼해도 괜찮을 것 같아."
라든가,
"그런 일이 있다 해도, 나만 생각하며 살지는 말아."
라고 한다. 사랑이 식을 걸까 하다가도 결론은 늘 "이만큼의 성숙"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연인의 관계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지만, 세상 모든 일은 저항과 용납의 양자 구도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안다. 사회 이슈에 대한 신문들의 논지는 찬성 혹은 반대로 갈리고, 저항이냐 용납이냐는 추상적 문제를 가지고 양편의 철학자들은, 어쩌면 자존심을 접고 포기를 선택하는 '항복'이 행복이라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수영을 할 때 초보는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이로 인해, 원하는 바와 역행하면서 몸은 가라앉게 되어있다. 골프는 또 어떤가. 레슨 첫 번째 키워드는 힘을 빼라는 것이고, 프로 선수도 슬럼프에서는 힘 빼는 초보적 덕목으로 우회하게 되어있다. 흔히 갖기 쉬운 아집을 내려놓는 일이 포기다.
포기는 저항의 존재가 흘러갈 수 있도록 용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아내의 이런 '조용한 용납'이 저항 인자를 나와 그녀 사이에서 사그라들게 하면서 차원 높은 관계로 나아가도록 유도하는 일을 오늘도 행복이라는 눈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