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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Nov 14. 2022

내가 누구라고, 다른 생명을 끊을 수 없는 이유

자두는 하루하루 힘들어한다.


눈도 멀고 귀가 들리니 않은지 오래지만 먹는 것 잘하고 산책을 여전히 좋아해 부둥켜안듯 매일 곁에 끼고 산다.  밤에 두세 번 먹을 것 요구하는데 이에 응하다 보니, 자다 깨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래도 늘 옆에 있는 것이 좋아 잠 설치는 것쯤 일도 아니다.


그런데 요즘 가끔 신음 소리를 내며 몸을 떨 때가 종종 있다. 사람 같으면 몸속의 통증이 지나갈 때 그런 발작을 일으키곤 할 그런 행위다. 혹시 암이 있어 전에 없던 통증이 시작된 것은 아닌가? 모르는 입장에서 상상해보곤 한다. 그렇다가 또 편안히 잠드는 모습을 보면 괜한 걱정이구나 안도하기를 반복한다. 비 프로폴리스 한 방울 입에 떨구면 신가 하게도 잠시 후 안정을 찾는다.




자두가 우리 집에 온 지 18년이다. 나는 한 때 밴쿠버에 있는 한 신학교의  특활 과목인 기타 강사로 나갈 기회가 있었다. 청년 때부터 교회에서 찬양 리더로 뼈가 굵었는데, 이민 와서도 그나마 잘할 수 있는 일로 수요 예배 찬양 인도로 수년을 봉사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다 보니, 소개로 강의를 나가게 되었는데, 자두를 만난 건 그 신학교 교장 목사님 자택을 방문하면 서다. 자두의 생물학적 아빠인 흰색 말티푸 (martipoo - 마티즈와 푸들의 잡종)가 쪼르륵 달려와 공 던지기 놀이를 하자고 한다. 개를 무서워했던 아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단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던지면 달려가 물어오고, 또 던지면 달려가 물어오는 모습이 너무도 예뻐 오래도록 놀았다. 교장 사모님이 얼마 전 새끼 낳았다고 힌트를 주었다. 내친김에 며칠 후 가 보는 걸로 약속을 잡았다.


새끼들은 손바닥만큼 작았고, 똥글똥글 예쁜 아기들은 7마리나 되었다. 그중에  홀로 외로워 보이는 자두가 한 구석에 있었다. 다른 자매들과 달리 놀지 않고 있다. 성격이 꽤나 달라 보인다. 아내와 나는 이 작고 여린 녀석을 먼저 골라 들었다. 보호해 주어야 할 것 같고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앞선다. 몸의 칼라도 한몫했다. 다른 녀석들이 다 흰 털이라면 자두는 독특한 갈색이다. 그때 곁에서 꽤 활발하게 놀고 있던 다른 강아지도 집어 들었는데, 바로 그 이후 15년의 행복을 갖다 준 바로 그 살구도 함께 선택되어  가족이 되었다.


살구는 15년을 살고 2019년에 죽었다. 마티즈처럼 작은 종자에게 잘 걸린다는 기도협착증으로 숨을 잘 못 쉬었는데, 의사는 나이가 많아 수술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 한다. 결국 안락사를 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후 오래도록 후회가 뒤 따랐다. 결국 판단의 최종 결정은 내가 했기 때문이다. 수술이라도 했으면 지금도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내내 정신을 괴롭혔다.




누군가의 생명을 끊는 일, 더는 함부로 할 수 없다. 그날 이후 벌레 하나도 집 안에서 발견되면 죽이지 않는다. 생포해 밖으로 내 보내는 일이 잦아졌다. 찻길을 달리다 도로에 유유자적하는 까마귀, 어떻게든 길을 건너려 우왕좌왕하는 다람쥐가 안전하게 건너기를 반드시 차를 세우고 기다린다. 새의 지저귀는 모습에서 생명의 환희를 보게 되었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만물 어떤 것 하나도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다른 생명을 끊을 수 있을까.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자두다. 다행히 소리를 낼 수 있어서 괴롭거나 욕구불만의 감정을 드러낸다. 오줌을 자기 잠자는 곳에 급해 배설해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담요를 갈거나 방향제 정도로 해결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것쯤,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능히 감당이 되는 일 중에 아주 작은 부분이다.


한밤 중 자다 깨어 신음 소리에 응답해 주는 경우가 많아, 잠을 설치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아들 딸은 이젠 보내 주라는 명목으로 안락사를 권장하는 일이 부쩍 늘었지만, 그럴 때면 그 힘든 이민의 생활 때 자두와 살구가 준 사랑의 힘으로 버티어 온 사실을 상기시킨다.


"너희들 우리 힘들게 할 때도 살구 자두는 늘 옆에서 위로를 주었어."


필요충분조건은 사람마다 다 다르기 마련이다. 어떤 시점에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고, 일을 끝낼 것인가에 대한 사고도 머리면 머리마다 다르다. 수많은 부모들은 평생을 장애자로 지내야 하는 자녀를 붙들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데, 내 주위에 유난히 많이 보인다. 한때,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장애 자녀를 주신다는 말에 현혹되어 그 사람들은 좀 특별하구나 생각했었다. 그 착각은 얼마 되지 않아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자식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능력자로 변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아프면 같이 잠을 못 자고, 병원에 수십 리의 추운 겨울 산도 단숨에 넘어갈 수 있는 것이 부모다. 그리고, 강아지를 입양해 사랑을 하게 되면, 그 객관의 존재였던 생명체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부모로 변신하고 만다. 20년 전에 내가 그랬다.




한 동물 보호 단체의 개 농장 르포 프로그램을 보고 난 후 다시는 그런 프로그램을 보지 못한다. 철장에 평생을 갇혀 살다 풀려나는 날 도살당하러 가는 생명의 종말을 도무지 볼 수가 없다. 유튜브에 돌발적으로 나오는 아프리카 사파리의 동물 생태계 영상도 잘 보지 못한다. 잡혀 먹혀야 하는 존재들에 대한 애절함  때문이다. 


그렇게, 생명을 사랑하다 보니 다른 어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못한다. 뭐 대단히 여겨왔던 나라는 존재도 알고 보면 그 생명체 어떤 것과도 동일한 하나의 생명일 뿐이다. 그 까닭에, 나로 인해 어떤 생명을 끊는 함부로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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