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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Aug 10. 2023

유두고 사건의 실마리

슬픔의 조건, 위로의 제목으로

메거진 “나는 매일 죽노라”는 삶을 꾸려나가는데 성경의 지혜를 구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이와 함께한 묵상 기록의 흔적입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 흔하게 접하는 방종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바위 틈새에서도 발견되는 신실한 지혜와의 만남을 사진처럼 남기고 싶습니다.


유두고 사건의 실마리


유두고 낙상 사망 사건을 묵상한다. 죽음으로 인한 수많은 추측성 발언이 난무했다. 하필 왜 창가에 앉았냐든가, 좋은 시간에 졸기는 왜 졸았을까에 대해 비판한다. 


은혜가 없는 곳에서는 떨어져 죽은 사람에 대해 시끄러운 소리들이 오고 간다. 이 사건이 기록된 사도행전을 보는 후세 사람들은 그 당시의 뜨거운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수준에서 사건과 사람을 판단하여 비판하곤 하는데, 당시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당시를 바라보니 시끄러울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바울의 강론 시점에 유두고가 떨어져 죽었는데 모두 조용하게 놀라고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사람마다 저마다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비판하고 자기를 나타내려 했던 것 같고, 이는 바울의 "떠들지 말라"는 명령에서 암시하고 있다. 잠잠하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는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슬픔은 위로와 강건하게 세우는 조건이 되는 것을 보고 있다. 


유두고라는 이름의 뜻은 "위로"로서 종에게 주어져 왔던 당시의 이름이다. 그가 당시에 종 같은 신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살아온 사람인 것은, 버젓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창가에 걸터앉았다는 사실과 피곤해서 졸았다는 설명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아니 그렇더래도 무슨 상관인가? 앞자리도 아니고, 홀의 뒷자리도 아니고, 변두리 창가에 앉은 주변 인물로라도 신앙의 공동체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잠을 자도 예배의 자리에서 잠을 자는 사람은 복되다. 말씀을 듣고 싶은데 피곤한 육신으로 졸음을 참지 못하는 이에게 어느 누가 비판의 잣대를 가져댈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 약한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어 가는 것이 교회다. 모두 용납하고 변화받아 가는 과정을 목격하는 일이란 감격스러운 신앙의 과정이다. 


유두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는 위기에 처했지만, 바울은 떠드는 사람들을 잠잠케 하고 있다.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리고, 생명이 살아난 청년과 함께 다시 회당으로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날이 새기까지 함께 이야기하고 떠났다. 


은혜의 자리에 인간미가 넘치는 바울의 자세를 본다.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슬픔의 사건을 사용하셔서 모든 이가 "적지 않게 위로를 받게"하시는 계기로 쓰신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서 우리는 잠잠해야 할 이유가 참 많다.            1          


슬픔의 조건에서 너무 오래 슬퍼하지 말자. 하나님의 계획에 초점을 맞추자. 

유두고의 일에서 겸손을 봅니다. 졸려도 하나님 말씀의 자리에 나가게 하시고, 예배에서 조는 사람을 보고 그를 축복하는 사람으로 서게 하소서.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우리가 모인 윗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바울이 내려가서 그 위에 엎드려 그 몸을 안고 말하되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 하고, 올라가 떡을 떼어먹고 오랫동안 곧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떠나니라. 사람들이 살아난 청년을 데리고 가서 적지 않게 위로를 받았더라. - 사도행전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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