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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Sep 21. 2020

설거지 담당입니다.

조용한 조력자, 입지를 상승시킨다

그릇들이 서로 포개져 있는 싱크대 앞에 서있다. 막막하지도, 귀찮지도 않은 일련의 수고가 즐거운 심드렁으로 바뀔 채비를 한다. 정성, 맛, 감사, 배부름, 거나함, 만족 등의 흔적이 숟가락, 젓가락, 물컵, 밥그릇에 남아있다. 그게 다 풀이하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일까 싶다가도, 이 흔적을 곧 씻어내려야 할 숙제 앞에는 결연한 일련의 의지가 필요하다.


두 가지 ‘고소한’ 프로젝트



하루 쉬는 공휴일의 점심, 맛난 음식을 차려준 고마움을 얼마 전부터 작은 헌신으로 보답하고 있다. 지난 6개월의 행보다. 헌신이라고 했지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를 일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여태껏 여겨졌던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이는 그렇다고, 강요되었다거나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 배웠다거나 한 것이 아니다. 그냥 어느 날부터 뻑뻑한 문짝에 기름 친 것처럼 스르르 열린 행동이었다.


음식의 맛은 말과 씹는 소리로 최종 완성된다


우선 표현에 관한 이야기로, 차려준 음식엔 잘 '먹어주고', 맛있다는 표현에 인색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필요 이상의 말을 덧붙이는 건 한국인에겐 어떤 루틴을 깨야하는 일일 테다. 그러므로 말은 노력의 하나다. "밥 묵자", "자자"로 대표되는 경상도 남자의 말투가 바로 다름 아닌 우리네의 말 실력이지만, 무뚝뚝할수록 더 멋진 사나이’라 동조하기에는 요즘 시대는 너무도 다이내믹하고 서구화되었다.


말과 언어가 이전 시대 같지 않게 인간관계의 더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는데 놀라고 있다. 드라마에서 보이는 말을 통한 관계 유지와 회복은 감동적인 장면을 늘 동반하고 있다. 내 마음 다 알겠지 하면서 더 나은 관계로의 발전 타이밍을 놓치는 일이 전근대적 사고로 보인다는 현실이 나의 큰 변화 중 하나다. 그러므로, 부부간에도, “수고했다’, “맛있다” 하는 표현 정도를 넘어 ‘좋은 말 일부러 하기’는 하나의 인생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고래도 춤추게 하는


영화를 볼 때, 상식과 충돌되는 장면들을 가끔 만난다. 적을 묶어두고 처단하는 찰나라던가, 도망치는 상대를 추격하는 주인공이 그 급박한 상황에서도 많은 말로 물어보고, 과정을 설명하려는 장면이다. 현실에서는 그냥 방아쇠를 당기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말로 전후 좌우 배경을 조금이라도 더 설명하고자 하는 영화의 특수성 때문일까? 그럼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그런 모습이 좋아 보인다는 것이다. ‘말도 입심 좋게 잘해, 표현도 세련돼,  남의 말 경청에 리엑션까지 좋은’, 그런 사람은 어디서나 사랑을 받는 이유가 있다.


나는 그렇게 밥 먹으며 말과 소리, 그리고 콧등의 땀과 눈빛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고래도 춤추는 칭찬이다. 맛있다는 말을 귓가에 흡수한 아내가, 그 말의 힘으로 깊은 내면에서부터 싱그런 꽃을 피우리라는 것을 절대 의심하지 않는다. 아내는 종종 나의 음식 씹는 소리를 빗대어 "어디다 팔아도 좋겠다" 한다. 나 스스는 음식을 먹으며 소리를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뭐든지 잘 먹고, 음식의 맛에 심취하는 까닭에 소리를 들을 경황이 없다.


인기 드라마인 "식샤를 합시다"에서는 출연자들의 밥 먹는 순간을 자세하게 비춰주는데, 특히 배우 윤두준의 연기는 압권이다. 음식을 입에 넣고 탄성을 내며 고개를 돌리는 연기는, 안 그래도 맛있게 보이는 요리가, 시청자들 입안에서도 동일하게 맛을 느끼게 한다. 음식의 맛은 씹을 때 나는 소리와 함께 완성이 된다.




미군에 근무 시절, 식당에서 단체 식사를 할 때면, 음식 씹는 나의 소리에  종종 신경을 써야 했다. 초병 시절부터 있어왔던 현상이라기보다 입대 후 1년이 넘은 때였다. 한 미군 동료로부터 음식 먹는 소리가 크다는 핀잔을 들은 것인데, 음식 소리에 민감한 서구 사회의 문화 때문에 나온 지적이었다. 미군들은 확실히 조용히 씹는다. 요리 자체도 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 종류가 대부분인 데다,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중요한 그들의 식사 예절이기 때문이다.

설거지하는 남편의 등은 아름답다

두 번째, 식사 후 설거지는 이제 내가 한다. 식사를 차렸으니 설거지는 해달라는 그딴 소리는 절대 하지 않는 아내다. 결혼 후  이 부분에 부담을 느끼거나 의무감을 가져보지 않았다. 역시 나는 구세대에 속한 인물 맞다. 설거지를 흉내 내듯  할 때가 있었다 해도, 그 작업은 참으로 꺼려졌다.


캐나다로 이주 후, 아내는, 한국에서와는 달리, 본인도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렇다고 밥과 설거지 담당을 자기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은 없었다. 남편도 하루 종일 외부에서 일하기 때문이고, 게다가 가부장적이기까지 하다. 이민은 특별히 여자들이 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하는 프로세스다. 안 하던 일해야지, 퇴근 후 집에 오면 집안일은 모두 여자의 손길이 그리워 눈만 껌뻑이고 있다.


결혼 이후 나는 설거지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언제나 부엌일은 아내의 몫이었고 당연했다. 한국에서야 가정 주부의 일로 여겨졌지만, 그래도 가끔 설거지해 주는 남편 이야기가 들려오면 무슨 큰일이 난 것쯤 보도되곤 하였다. 어쩌다 컵이라도 씻을 양이면, 어머니께서 달려와 고추 떨어진다고 쌍수로 막았다. 부모님의 성화가 더더욱 싱크대 앞에 가까이 가는 시간을 멀리해 왔던 것이다.


설거지와 부부관계의 상관관계 연구


설거지를 부부가 공유하는지 여부는 부부관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연구 보고가 있다. 미국 현대 가족 협의회가 발표한 보고서다. 내용은 ‘누가 설거지를 할 것인가’의 문제가 인간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인데, 생활 용품의 쇼핑, 빨래, 청소 등 다양한 가사를 조사한 결과, 설거지의 공유는 상대와의 관계에 대한 만족도가 높이고 불화가 줄여준다고 했다.


이와 같은 보고서를 꼭 참조할 필요도 없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설거지를 해주면 관계가 좋아진다는 것은 상식 중 상식이지 않을까? 아내가 밥을 준비하느라고 지지고 볶고 담고 차리는 수고에 비하면 설거지란 아주 간단 단순한 일이다. 어느 단체든 개인이든 관계와 관계 사이에 서로를 배려해주는 작은 마음 하나면 좋은 관계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설거리를 통해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세계로 들어서면 배우게 되는 색다른 맛이 있다. 이전엔 모르던 뽀득뽀득한 개운함을 새롭게 선사하기도 하고, 식사 후 뜨거운 물로 행주를 적셔 식탁을 닦는 청결의 감각이 그것이고, 비좁은 싱크 안에 질서 없이 놓인 그릇의 자유로움, 그리고, 세제를 묻힌 스펀지에서 씻겨나가는 이물질로 부터의 해방감도 다 그런 종류의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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