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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Dec 26. 2017

비와 눈의 차이점

예수 그리스도 그 십자가의 능력

눈 오는 날이 참 좋습니다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는 순백의 그 깨끗함도 좋고.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서 기다려지는 크리스마스와 연말의 두근거림도 좋고.

어릴 적 눈 오는 날 동생들과 친척 언니 오빠와 집 뒤뜰에서 하던 눈싸움 놀이의 기억도 좋습니다.


영하의 날씨에만 유지되는 차가운 눈이지만.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왠지 차가움보다는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지기에, 

눈이 참 좋습니다.


Photo by. Printeboek

그런데 싫어하는 것이 있습니다.

눈이 내린 뒤 더러워진 길을 걷는 것입니다.

분명 하얗고 깨끗했던 눈이, 바닥에 있던 흙과 먼지와 뒤섞여 더러워지고 질척거립니다.

눈 내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의 이유가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것은 눈의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새하얀 그 눈은 그냥, 더러웠던 땅이 드러나게 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눈이 더러웠던 게 아니라, 눈이 떨어진 그 자리가 더러웠기에, 흰 눈과 대비되며 더러움이 드러난 것이지요.


그와 반면에 비는 더러움을 씻어 내려 버립니다. 

더러움 위에 살포시 앉아 그 더러움을 잠시 가려주거나, 그 더러움과 섞여 더러운 것을 드러나게 하는 눈과 달리.

세차게 내리는 비는, 더러움을 잠시 가려주지는 못하지만, 비 그 자체로서 깨끗함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 더러운 것들을 자신과 함께 씻어 내려 버립니다.

Photo by. PublicDomainPictures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과 비가 마치 율법과 십자가 같다는 생각.


율법은 단지 내 안에 있던 더러움들을 드러나게 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내 안에 있던 더럽고 추악한 죄들이 선명하게 드러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로마서 3:2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7:7)"




그런데 십자가 은혜는 그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죄에 종노릇 하지 않게 해 줍니다.

영생을 얻게 해 줍니다.

이 땅에서도, 구원함을 입은 자유인으로서의 자유함을 누리게 해줍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지만, 십자가 사랑은 그 죄를 씻어 없애며 우리를 의롭다 말합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로마서 5:20-21)"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로마서 8:2-3)"




율법의 유익이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잊지 않게 해 줍니다. 

그러나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때의 그 좌절과 아픔과 무기력을.

십자가 사랑의 은혜가 덮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내 모든 죄악과 연약함을 덮고도 남을, 비교할 수 조차 없는 그 큰 은혜가 넘칩니다.

Photo by.geralt

어제도 죄를 지었고, 오늘도 죄를 짓고 있으며, 내일도 죄를 지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실이 나를 좌절시키기도 합니다. 

너무나도 비통하고 두렵고 무기력하게 느껴집니다. 

더 살아갈 용기가 없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또다시 죄를 지을 것이 너무나 두렵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1-25)"




그러나 여기 소망이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의롭다 말하십니다. 

그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죄 없다 여김을 받습니다.

내가 의인이었을 때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를 지으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짓던 죄인이었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어 죄에 빠져있던 그 상태마저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로마서 8:39)"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로마서 5:8)"




곤고한 사람입니다.

정말 그러고 싶지 않지만, 또다시 죄를 짓고 실수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수할 용기를 주십니다. 

그 십자가 사랑이 나를 숨 쉬게 합니다. 

다시 웃으며 힘차게 살아가 자유와 힘을 주십니다.

Photo by. TheVirtualDen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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