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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ishna Aug 26. 2020

사이드 스토리_09

그린이 이야기.

이 아이는 내게 매우 특별한 아이다. 이 글에서의 필명은 그린이라고 하자.


그린이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때부터인데, 선머슴 같은 여자아이였지만 눈빛이 초롱초롱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사 가서 한동안 못 봤다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 다시 돌아왔다.


다시 돌아온 이유는 수학을 이제 좀 공부하려고 빡센 학원가에 있는 학원을 다녔는데, 안타깝게도 풀라고 준 문제지에서 아는 것이 없어서 질문을 했더니 제대로 된 설명을 듣지 못 했다고 한다. 아마 좀 더 극적인 스토리가 있던 것 같은 기억은 있지만, 패스하도록 하자.


그린이의 집에서 내가 가르치는 곳까지는 솔직히 좀 많이 멀었는데, 그린이는 고맙게도 내가 가르치는 곳까지 와서 수업을 듣기로 했다. 그 당시엔 나도 수학을 가르치는 체계가 완성되어 있지 않았고, 선생님으로서도 완성되어 있지 않았을 때라, 솔직히 그런 수고를 할 만큼의 가치는 없었는데 그저 그린이에게 많이 고마울 뿐이다.


뭐, 같이 공부하면서 교우관계에 대한 상담도 많이 하고, 뭔가 수학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것보다 둘이 띵가띵가를 더 많이 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런 부분은 일단 많이 생략하도록 하자. 프라이버시니까!


그린이가 왜 내게 특별한 아이냐면, 이 아이 덕분에 지금의 수학체계를 만드는 중요한 교훈 하나를 얻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확률과 통계 단원에서 이산확률변수의 평균과 분산에 대해 가르쳤던 적이 있다. 사실 공식 자체는 별것이 아니라서 그냥,


이렇게 이렇게 하면 평균과 분산이 나와


라고 설명을 간단히 했는데, 그때 그린이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쌤, 계산은 할 줄 알겠는데, 그래서 그 평균이 무엇을 의미하는 거에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확률분포표에서 이렇게 저렇게 계산하면 평균이라는 어떤 숫자가 나오는데, 그 숫자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나는 구할 줄만 알았지,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때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때 나는,


이건 굉장히 실용적이고, 반드시 필요한 질문이 아니던가?


이라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말해서 구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고 뭔가를 구해놓고, 그것으로 문제를 풀어서 끝! 이라고 하면, 그 공부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나는 그 당시에 수학을 가르친지 5년 이상 된 강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그런 의문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린이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을 구해서 무엇에 쓰는지, 그 구한 숫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 것이었다.


솔직히 그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몰랐다. 그런 질문을 던진 학생도 아마 그린이가 처음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그때 나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쓸데없는 질문 하지 말고, 그냥 이렇게 풀면 된다.


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라고 해야할지.


선생님이라고 하는 직업의 위험한 부분이 바로 이것인데, 학생에게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다. 선생님은 학생보다 우위에 있다고 이미 관계적으로 정해져 버렸기 때문에, 선생님이라고 하는 직업은 스스로 오만해지기 매우 쉽다. 그래서 그것에 취하면, 학생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과도하게 상처를 받는 경향이 있고, 학생의 질문이 자신의 부족함을 건드릴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만약 그린이와 내가 솔직하게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나도 체면 때문에 그냥 별거 아닌 걸 궁금해 한다며 내 부족함을 숨기고 갔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볼꼴 못볼꼴 다 본 사이라,


어, 그러네. 이거 나도 생각 안 해봤는데, 한번 고민해 봐야겠다.


라고 대답하고, 그 자리에서 둘이 같이 끙끙대며, 확률변수의 평균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계속 보완하며 깨달았던 것은, 그린이의 그 질문이 쓸데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통계라는 것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 확률변수의 평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것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해서 아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확률변수를 설명할 때 반드시 그 내용을 배경설명처럼 설명하고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통계에 대한 핵심이니까.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고등학교 때 나는 통계에 대한 문제를 그렇게 많이 풀고 나서도 성적이 안 좋았던 것이다.


이렇듯 그린이는 수학이 아니라 뭐랄까 본질에 대한 통찰을 잘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개념설명을 할 때, 그 개념에 대한 설명을 아주 잘 이해했다. 다만, 그린이는 수학을 늦게 시작해서 수학에 대한 계산을 익숙하게 하지 못 했다. 만약 지금이었다면 좀 더 갈궈서 잘 하게 시켰을테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나와도 개념적으로 잘 분석을 하는데, 방법을 알아도 계산이 불가능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린이를 위해서 비유도 하나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는 길은 다 아는데, 정작 올라갈 능력이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수학을 반에서 2등을 했던가, 어땠던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본인이 그것에 만족해 해서 나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선행학습도 안 하고 저 정도면 그냥저냥 잘 한 거 아닌가. 물론 그린이네 반 애들이 수포자가 많아서 그렇긴 했지만.


그렇게 그린이는 졸업을 했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부끄럽게도 나를 따라 선생님이 되었다. 왜 수학 선생님이 아니냐고 처음엔 삐져서 얘기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린이한테 딱 맞는 과목은 수학이 아니었던 것 같다. 뭐, 어쨌든 간에,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


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보통 무엇을 해도 행복하게 산다. 뭐, 어떤 사람은 그게 무슨 대단한 질문이냐고 나도 할 수 있는 거라고 말하겠지만, 내가 15년 이상 수학을 가르치면서 저런 본질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했던 학생은 한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냥 주어진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그 주어지는 지식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어쨌든 지금 그린이는 매우 잘 살고 있고, 굳이 좀 강조해서 말하자면, 그린이 덕분에 나는 선생님으로서 완성될 수 있었다. 그때 내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으면, 나는 또 한참을 고생해야 지금의 단계에 이르렀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말했던 거다.


때로는 학생이 선생님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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