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꿈은 자연사입니다, 빨리 이뤄지면 더 좋고요.

'상담 그 후, 영원히 행복해졌답니다'는 쉽게 오지 않는다, 새로운 시작

by 나다움

불안이 무언가가 일어나리라는 두려움의 징후라면, 우울증두려움이 현실이 될 때 나타난다.

-'당신의 특별한 우울 : 우울증에 걸린 정신과 의사의 치료 일기' 中, 린다 캐스크 저-


"그래서, 저하고는 언제까지 볼 거예요? 전 우선 올해 12월까지 계약이 돼있어서 그때까지 볼 생각이었는데."

우선은 5월 5일까지는요. 제가 거짓말은 잘 못해요.
근데 또 모르죠. 여전히 살아있듯이, 앞으로도 살아있을지도요.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는걸요.


그날은 평소와 달랐다. 내가 유독 특정 문제에 부딪히면, 심하게 좌절하고 쉽게 일어나질 못한다. 그래도 여차저차 잘 버텨왔는데, 그날은 막아놓은 둑이 터지듯 쉽게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밤에만 먹던 항우울제 외에도 추가로 처방해주신 약을 4시간 간격으로 계속 먹어야 눈물이 나지 않았다. 상담실에서도 자꾸만 모든 것을 놓고 싶다는 얘기만 반복했다. 선생님은 차분함을 잃지 않으셨고, 평소와 다름없이 나의 모든 이야기를 몸으로 듣고 계셨다. 조금은 진정이 되고, 언제나 밝음을 잃지 않는 장점이 있는 나는 눈물을 닦으며 웃으며 말한다.

근데, 제 꿈은 자연사예요.
가장 빠른 시일 내에 하는 자연사. 하하.
설사 자살을 하더라도 자연사로 보이는 자살이어야 해요.
그래서 어려워요. 그게 쉬웠으면 벌써 죽었겠죠?
제가 완벽주의자인 게 또 이럴 때 쓸모가 있어요. 하하.

"왜 꼭 자연사여야 하는데요?"

상담 선생님은 역시 다르다. 나의 이 이야기를 애써 넘기지 않고, 그저 내가 더 얘기할 수 있도록 질문하신다.

"아, 그게요. 제 친한 친구가 자살을 했거든요. 직접 겪어봐서 알아요. 자살자 주변에 남은 사람들의 아픔을요. 오래전 일인데도, 아직까지도 죄책감이 남아요. 내가 막을 수는 없었는지에 대해서요. 그래서 제가 만약에 자살을 하게 되더라도, 누가 봐도 자살처럼 보이지 않게 해야 해요. 저는 제가 좋아서 한 선택이라지만, 남겨진 이들에게 원치 않는 숙제를 주고 가는 것은 미안하거든요."

"죽음의 순간에까지, 여전히 타인을 배려하네요. 00 씨는요."

"제가 좀 따뜻한 면이 있죠? 하하. 오지랖이라고 해도 그게 제 마음이 편한걸요. 제가 겪어 봤을 때 힘든 것은 남도 힘들 거라고 생각하고 안 겪게 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전 유서도 쓰지 않을 거예요. 왜인 줄 아세요? 제가 또 알아봤는데, 유서가 발견되면 의도된 죽음이라는 게 티 나는 거잖아요. 그리고 중요한 게, 사고사면 제가 보험금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제가 가는 마당이지만, 저의 역할 중 하나인 경제적 소득창출에 기여하고 싶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라도 제가 죽게 되면 이왕이면 회사에서도 산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육아휴직으로 인한 승진 누락과 코로나 19로 인한 업무 가중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라고 꼭 얘기해주세요. 하하."


그렇게, 나의 진심을 특유의 밝음은 잃지 않은 채 얘기해나갔다. 사뭇 너무 진지하신 선생님을 풀어드리고 싶었을까, 말을 하면서도 괜히 나의 생각을 여과 없이 말해서 선생님께 불편한 진실을 드린 건 아닌가 고민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또 다른 사실도 서둘러 말씀드렸다.

"아, 그리고요. 제가 또 완벽주의 성향이 있고, 뭐든 대비하는 습관이 있어서 안전장치가 있긴 해요. 혹시라도 제가 충동적으로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봐 저희 집 베란다에는 화분들이 많아요. 제가 한 번은 밤에 베란다에서 멍하게 보고있는데, 뛰어내리려 해도 그 화분들을 다 옮기는 게 너무 귀찮은 거예요. 그래서 뭐 그냥 잤어요. 하하. 사실 밤이 제일 위험해서, 밤에는 일찍 자요. 이번 주는 특히 밥도 영양가 있는 걸로 잘 챙겨 먹었어요. 잘 자고, 잘 먹고, 일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야 자살을 하더라도, 자연사를 가장한 자살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요. 하하. 그러니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상담실에서 내손은 항상 종이와 펜이 들려있었다. 선생님과의 대화 중 중요한 것은 메모하고, 상담 후에 적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빈손으로 상담실을 찾았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다. 이런 나에게 선생님은, 본인의 연락처와 주소를 나에게 적어주셨다.

이건 나의 원칙을 깨고, 내 선택으로 하는 거예요.
언제든지 연락해요.
미안하지만, 단축번호 1번을 나에게 양보해줘요.

선생님의 연락처를 받고 또 한 번 울컥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상담이기에, 상담 선생님의 개인 연락처는 공유하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나에게 본인의 연락처를 선뜻 적어주신다.

"감사해요. 그래도 연락은 안 드릴 거예요. 연락처 적어주신 것만 해도 저에게는 큰 힘이에요."

"00님은 저에게 특별한 내담자예요. 항상 메모하며 뭐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모습에 저도 더 열심히 하게 돼요. 매주 00씨를 만나는 요일을 기다렸고요. 개인 연락처를 드리는 것은 저의 선택이에요."


선생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신다. 이것은 '본인의 선택'이라는 말, 선생님의 그 문장이 또 와 닿는다.

눈앞에 내담자가 '제가 곧 자살할 것 같아요.'란 말에 직업적 윤리의식을 발휘하여 쥐어주신 개인 연락처일지도 모르지만, 그 상황도 본인의 선택임을 강조하신다. 그 말이 오래 머문다.


나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나, 계속 고민이 많아진다. 그렇게 주 1회 상담을 주 2회로 늘려간다.

또 새로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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