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멸은 모르겠고 관리는 합니다

악화와 완치 사이 그 어딘가에서 움직입니다

by 나다움

불행이란 태양과도 같아서 구름이나 달에 잠시 가려지는 일은 있을 망정 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거기 늘 태양이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이들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온몸으로 껴안을 때, 그 불행은 사라질 것입니다. 신의 위로가 아니라면, 우리에게는 그 길뿐입니다.

-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김연수-


포기만이 답일 때가 있다. 2시간 걸려 정리한 집이 다시 난장판이 되는 데 고작 2분도 안 걸리는 것을 본 후, 우리 집에서 인테리어는 사치이며, 요즘 유행인 미니멀 라이프와는 정 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현실'을 깨닫는다. 온갖 장난감들을 늘어놓고, (내가 보기엔 무질서지만) 본인들만의 규칙이 존재하여 대환장 집구석에서 평화롭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한때 꿈꾸었던 모델하우스 같은 깔끔한 집에 대한 '이상'은 내려놓는다.

다만, 혼돈의 공간(?)에서 생활은 계속되어야 하기에 현실과 이상 사이 그 어딘가에 타협점을 만들었다. 가급적 새로운 물건을 집에 안 들이고, 필요 없는 것은 집 밖으로 내보내고, 하루에 딱 5분씩만 시간을 정해 정리하고자 한다. 이렇게 세 가지 원칙만 지켜가면서, 아이들이 원하는 공간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되, 집안에서 보행에 지장을 줄 정도(?)가 아니면 족한 것으로 나의 집에 대한 이상을 낮춘다.(그리고 손님은 무조건 집 밖에서 본다.)

나의 마음관리도 마찬가지다.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고,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는 '이상'은 내려놓은 지 오래다. 매일 벌어지는 복잡 다양한 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여리고 섬세한 나의 성향이 더해지면 순탄할 수가 없다. 그래서 타협점을 만들고, 간단하지만 꼭 지켜야 하는 원칙들을 세웠다. 감수성이 폭발하는 밤 11시~새벽 3시는 피해 가급적 일찍 수면을 취하며, 술 마시는 것을 자제하고(슬플 때 음주는 엄격히 금지), 하루 5분 명상 또는 하루 10분 이상 운동이 그것이다. 이상적인 롤모델 두지 않는다. 그저 지금의 나에서 출발한다.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보내면 그것으로 족하다.

항우울제를 줄여가다가 최근에는 악화되어 의사 선생님과 권유로 약 용량을 늘렸다. 사회적 가면에 익숙해 누가 봐도 푼수끼 넘치는 다혈질 애둘엄마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넘실대는 슬픔과 포장된 무기력한 좌절이 담겨있다. 나 스스로 현실을 감당하고 버티서 내게 주어진 역할들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래야 나의 원칙들이 지켜질 수 있고, 그렇게 원칙들이 지켜진 하루하루가 쌓이면 다시 마음의 그릇이 커질 테니까 말이다.


사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태를 재난경보 울리듯, 비상으로 생각하며 이 불안정함의 근원을 완벽히 없애서 그럴싸한 상태로 만드려고 노력했겠지만 이제는 그냥 둔다. 그럴 수 있지, 하며 있는 감정을 그대로 인정해준다.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나 자신을 칭찬하며 그냥 현상유지만 해도 잘하고 있다고 다독인다. 오히려 그것이 나의 마음관리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항우울제를 먹으며 내가 직접 경험한 후 깨달은 결론이다.

반팔을 입는 게 자연스러운 여름이지만 7월 초에 비가 내리면 도톰한 카디건이 생각나는 쌀쌀한 날도 있듯이, 마음의 병이 완화되어 가는 중에도 유난히 아픈 날도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겨울이지만 두꺼운 외투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온화한 날도 있듯이 악화되어가는 중에도 유독 마음의 날씨가 따뜻한 날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을 붙잡지 않고 내버려 두려고 한다. 그렇게 지켜보고 인정하려 한다, 누구보다 내 편이 되어서.


누군가 나의 병에 대해 좀 어때? 괜찮아?라고 물어보면 이제 이렇게 답한다.

박멸은 모르겠고, 관리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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