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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Oct 15. 2024

모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것들

알고 나면 보이는 것들 : 네이티브 아메리칸에 대하여

  모뉴먼트 밸리에서 제일 좋았던 것을 꼽으라면 단연 '숙소'를 꼽겠다. 모뉴먼트 밸리에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이 운영하는 숙소(The view hotel)가 유일하다. 남편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예약했다면서, 다음에 묶을 그랜드캐년 캠핑장보다 10배 넘게 비싼 숙소가 그만큼 값어치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향과 함께 네이티브 아메리칸 전통음악이 흘러나왔다. 구슬프면서도 힘 있는 피리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숙소 테라스에 앉아 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속에 휘젓던 흙탕물이 밑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아침엔 일출을 보면서 모뉴먼트 밸리 상징물인 바위(침식 잔구, 浸蝕殘丘)를 종이에 그리는 두 아이를 보니 이것이야 말로 내가 그리던 고요하고 잔잔한 여행이었다.

[ 숙소에서 바라본 풍경, 내가 좋아하는 여행 사진 중 하나 ]

  멀리서 봐도 멋진 바위들을 가까이서 보려고 차에 탔다. 지면이 상당히 거칠어서 엉덩이가 자동으로 들썩거리는 구간을 지나면 비교적 갈만한(?) 오프 로드가 나온다. 가까이서 본 붉은 사암은 눈길을 사로잡기 충분했다. 창밖의 풍경에 '와!!!'하고 끝이 올라가는 하이톤 탄성을 짓던 우리는 차에서 내리기만 하면 '와...'하고 한없이 속삭이는 중저음으로 바뀌었다. 한여름에 만난 사막지형이었기에 이른 아침이었지만 기후를 극복하지 못한 채 사진만 찍고 후다닥 차로 다시 피신하기를 반복했다.

[ 장갑 모양의 돌덩이 앞에서 장갑 포즈를 취하는 어머님 아들, 그리고 장소를 초월하여 땅파기에 여념없는 내 아들 ]

  숙소에서 인상 깊게 봤던 붉은 사암 앞 표지판(East Mitten, West Mitten)을 보고 '아하!' 하는 짧지만 경쾌한 감탄을 내뱉었다. 둘러보니 주변 사람들이 손장갑을 낀 듯한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멀리서 봤을 땐 '크고 멋지다'라고만 단순히 생각했지 무슨 모양을 닮았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표지판을 읽고 보니 장갑이 나타났다. 그냥 지나쳤을 땐 몰랐는데 이름을 연상하고 보면 그 형태가 더 잘 보였다. 그렇게 이름 없는 바위들까지 아이들과 이름을 지어가며 모뉴먼트 밸리 구경을 마쳤다.(사실 아이들은 작은 것에 기뻐하기도 하지만, 굉장한 것을 보고도 금세 지루해하기에 "바위 이름 짓기 놀이"를 권장하며 무사히 관광을 끝낼 수 있었다. 흑)

  

[ "Three Sisters" 는 세명의 수녀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 바위를 드는척 하는 첫째, 명상하는 척 하는 둘째. 아이들에겐 여기가 어디고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사진도 본인이 좋은 컨셉으로 찍는 놀이의 일부 ]

  모뉴먼트 밸리는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로 만났다면, 다음에 간 그랜드 캐년은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본 유명한 곳이라서 기대가 컸다. 규모가 엄청났기에, 우리는 그중 일부인 사우스림(South rim)만 보기로 했다. 그랜드 캐년은 'Grand'라는 이름값을 하는 곳이었다. 좌우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끝도 없이 펼쳐진 협곡, 그 깊이를 가늠하기 위해 시야를 밑으로 떨구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높이도 어마무시했다. 돌아다니다 보면 세계 여러 나라의 말이 다 들리는, 그야말로 전 세계인의 관광지였다. 그랜드 캐년은 자연 그 자체이지만, 많은 관광객을 위한 편의시설도 훌륭했다. 셔틀버스부터 와이파이, 상점(제너럴 스토어)까지 만족스러웠다. 특히 제너럴 스토어는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는데, 그랜드 캐년에서의 다양한 품목과 합리적인 가격을 예상하고 들어갔다가 실망하곤 했다.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그랜드 캐년이었다.

  그랜드 캐년에서도 트래킹을 했는데, 정오에 가까울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경험을 떠올리며 가급적 일찍 출발했다. '사우스 카이 밥 트레일(South Kai Bob trail)'을 선택했고, 그중 '우아 포인트(Ooh Aah Point)'를 향했다.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두 아이와 약 두 시간 정도 트레킹을 했다.(다시 한번 둘째와 끝말잇기 무한루프에 빠져들었다. 허허) "우와", 도착하니 목적지의 이름이 절로 입에서 나왔다. 셔틀에서 내려서 바로 볼 수 있는 협곡과는 무엇이 다르냐고 묻는다면, 지리 무식자로서 설명하긴 어렵다. 하지만 두 다리로 땅을 밟아가며, 입으로는 끝말잇기로 아이를 달래 가며 두 시간에 걸쳐 당도한 '우아 포인트'는 뇌리에 오감으로 선명하게 남았다. 안내자처럼 먼저 지나간 당나귀 배설물의 꼬릿한 냄새, 따사롭게 내리쬐던 햇살과 간간이 불던 시원한 바람, 빈틈없이 계속 조잘거리던 둘째 아들의 목소리 등 그날의 시각적인 풍경뿐 아니라 다양한 감각이 동원되어 만든 장면들이기에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그랜드 캐년 여행 시 가장 복병은 날씨였다. 7월 한낮에 돌아다니다 보면 팔다리가 늘어져서 흡사 고릴라 같은 자세가 된다. 게다가 아이 둘은 어딜 가도 똑같은데 왜 그렇게 힘들게 올라가고 내려가냐며 투덜거리기에 오전 트레킹을 마치고 실내인 그랜드 캐년 비지터 센터(Vister center)로 들어갔다.(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나면 이런 기분일 듯. 하하하 ) 아이들에게는 교육을, 나에게는 휴식을 선물할 겸 뭔지도 모르고 들어가서 한참 영상물을 보았다. 우연히 들어가서 보게 된 영상에서 그랜드 캐년과  모뉴먼트 밸리와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네이티브 아메리칸" 이었다. 모뉴먼트 밸리는 '나바호(Navajo)' 부족, 그랜드 캐년은 '하바수파이(Havasupai)'와 '호피(Hopi)' 부족 등 수천 년 전부터 아메리카 원주민이 거주하던 땅이었다. 19세기 후반 유럽계 미국인의 서부확장으로 이들은 강제로 고향에서 쫓겨나거나 이주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것이다.

 

  

  자연지형이 아름다워서 온 관광지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나니 애틋했고 먹먹했다. 갑자기 누군가 내 집에 누군가 들어와서 이젠 더 이상 너의 집이 아니니 나가라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무거운 추를 달아놓은 듯 마음 한쪽이 무거웠다. 고무적인 사실도 있었다. 가장 인기 있는 트레일 중 하나인 "브라이트 엔절 트레일(Bright Angel Trail)"에 있는 "인디언 가든(Indian Garden)"의 명칭이 최근에 "하바수파이 가든(Havasupai Gardens)"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제 와서 정원의 이름 하나  바꾼다고 해서 강제 이주당해야만 했던 과거의 슬픔이 옅어지진 않겠지만, 아픈 역사를 인정하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려는 시도임은 분명했다.

https://www.grandcanyon.org/about/news/whats-in-a-name-newly-dedicated-havasupai-gardens-shows-words-have-power

  모뉴먼트 밸리와 그랜드 캐년의 공통 키워드를 또 하나 꼽자면 '이름'이다. 모뉴먼트 밸리에서 거대한 바위들을 그냥 보았을 때는 그저 돌이었던 것이 그 이름(Mitten, Three Sisters, Elephant Butt 등)을 보고 나니 이름에 걸맞는 형상을 더 구체적으로 찾고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랜드 캐년도 마찬가지 었다.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잘못된 '인디언'이란 말 대신 '하바수파이'라는 생소하지만 정확한 단어를 부여하니, 가려진 그랜드 캐년의 역사가 드러났다. 이름의 힘이란 그런 것이다. 어떻게 부르느냐에 따라 대상의 속성을 좌우하는 것. 사소해서 잊고 있었던, 명명의 위력.

  마침 이 글을 쓰는 날이 미국에서는 공휴일이다. 작년에는 콜럼버스의 날(Columbus Day)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Native American Day"라고도 불린단다. 전자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면, 후자는 원주민의 문화와 기여를 기리고 존중하기 위한 의미가 더 클 것이다. 같은 사건이지만 다른 시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이름이 주는 프레임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모뉴먼트 밸리와 그랜드 캐년을 떠올릴 때, 다른 수식어도 좋지만 네이티브 아메리칸 부족의 이름도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덧.

'명명의 중요성'에 꽂혀서 소소하게 아들에게도 적용해 보았다. '숫기 없는' 첫째 아들, '지구력 없는' 둘째(그리고 '다정함 없는' 어머님 아들까지). 없는 것에 치우쳐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그 특징을 더 강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그래서 다른 수식어를 붙여주기로 한다. '차분한' 첫째 아들, '호기심 많은' 둘째(그리고 '성실한' 어머님 아들까지). 입에 착 붙진 않지만, 노력은 해보련다. 훗.  

[ 벼랑끝으로 가는 어머님 아들에게 "그만 가!"를 외쳤다. 지나가던 외국인 할머니 한마디 하셨다, Crazy man. 남은 여행 운전 누가해? 자중해! 란 말은 삼켰다. 하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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