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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Nov 08. 2021

[상념] 수의 기운,

going through,

주말 경주에 2시간 정도 머무르며 월정교 옆의 남천을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지나쳤다. 

스스럼없이 흘러내리는 냇물을 바라보며 내가 좋아하는 냇가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들추기 시작했다.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흘러간 그녀들이 내게 물어올 때면 난 항상 같은 대답을 했다. 


"난 산이 좋아, 계곡이 너무 좋거든. 맑은 계곡물을 보면 나의 마음까지 정화되는 기분이야. 바다는 그에 비해 너무 정적이야."


언제부터인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난 그냥 산이 좋고 냇가가 좋고 흐르는 물이 좋았다. 바닥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냇가를 바라볼 때면 나의 마음속까지 투명히 비치는 느낌이었고 더러운 나의 손 끝마저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고도 신라에서 켜켜이 꺼내든 물에 대한 추억과 상념, 조금씩 꺼내보고자 한다, 더럽혀진 내 영혼을 조금이나마 정화하기 위해.  




질마재였던가, 

고등학교 옆에는 높지 않은 산이 있었다. 정확히는 산자락에 지어진 학교이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수원(水原)을 찾아보자며 냇가를 따라 계속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없이 올라가다 보니 수풀이 너무 우거져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었다. 수원을 찾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 것을 깨달으며 결국 다시 내려오고 말았다. 

수원을 찾는 일, 근원을 찾는 것이 중요했을까,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고 원인을 알면 해결책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어쩌면 강박일지도 모르겠다. 주어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는 진리를 지금이나마 깨우치고 있다. 

마침 오전에 한 달 여만에 만난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지금은 going through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모든 선택은 OO님이 하고 계신 거예요. 그 점을 잊지 말고 최선을 선택하며 상황을 진전시켜 봐요."



"빠졌어! 어떡하지?"

초심자의 행운이었던 건지, 인자한 딜러형의 여행자를 위한 아량이었던지, 같이 간 형의 소소한 베팅이 성공했다. 대략 만원 정도로 20만원 정도를 벌었기에 우리 둘은 한껏 호조 되어 카지노 밖을 도망치듯 나왔다. 너무 업된 나머지 나는 루체른의 호숫가에서 그만 선글라스를 빠트리고 말았다. 너무 깨끗하여 속이 환하게 보였지만 얼마나 깊은지는 전혀 가늠이 되지 않는 스위스의 맑은 호수, 난 당시 내 몸값보다 비싸다 싶은 선글라스를 구출하기 위해 감히 내 짜디짠 몸뚱이를 호숫가에 우걱우걱 집어넣기 시작했다. 무릎 정도일 거라 호기롭게 예상하고 발을 담갔으나 허벅지까지 푹 담그고 말았다. 물이 너무 깨끗했던 것일까, 축축한 바지와 따사로운 추억을 그렇게 등가 교환하게 되었고, 지금도 가끔 그 장면이 마치 슬라이드처럼 떠오른다. 



"도시 이름이 바스야, bath. 로마시대부터 온천 목욕탕이 있던 곳 이래."

바스에 도착하자마자 로마시대의 목욕탕을 방문했다. 불투명한 물은 놀랍게도 따뜻했지만 그 탁함에 몸을 담근다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옛날의 사람들이 저런 탁한 물에 몸을 담근 것일까, 아님 세월이 저 목욕탕을 탁하게 만들었을까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내 곧 궁금증은 사라지고 말았다. 

제목에 걸어둔 저 사진, 저 끝없이 쏟아지는 물에 나는 소히 '물 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층계 층계 쏟아져 블랙홀처럼 빨려 내려가는 물을 보며 나도 저 물에 함께 빠져들어도 행복하지 않을까 하는 불경한 상상마저 들었다. 이렇게 조그마한 도시에 저렇게 대담한 자연이 공존할 수 있다니, 물이 세차게 만들어내는 쏟아지는 파열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떠올랐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다시 오고 싶다.'




"물이 많네요, 수의 기운이 많아."

사주를 보러 가면 항상 듣는 말이다. 사주에 물이 많아서 물 가까이 사는 것이 안 좋을 수도 있다고 들었건만, 물이 마냥 좋아서 항상 물 근처에 살고 있다. 

고즈넉한 바다나 시나브로 흐르는 한강보다, 새초롬히 흐르는 양재천이 좋고, 시원하게 시작되는 청계천이 좋다. 


이제 좀 흘러가고 싶다, 

흘러 흘러가다 보면 어디로든 가게 되지 않을까,

다만, 뜻했든 뜻하지 않았든 조금은 내 의지로 흘러가 보길 소망해본다,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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