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rng Feb 05. 2022

[감상] 죽어야 살으리랏다,

살려면 죽어야 할까, 

또 좀비다,

아마 숱한 사람들의 감상평에 반드시 들어갔을 문구라 미루어 짐작한다. 

부산행, 킹덤, 살아있다 등 한국판 좀비는 많고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비 영화는 그 특유의 매력이 있다. 

죽어도 죽지 않고, 죽을 듯 따라오는 그들을 보며 관객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다시 또 빠져들고 말았다. 








나라면 그냥 일찌감치 물려서 새 삶(?)을 찾았을 거야

라는 생각이 보는 내내 들었다. 

저렇게 희망이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끝까지 집요하게 살아남으려 애를 써댈 수 있을까 

운동 신경도 좋지 않고 근력도 크게 앞서지 않는 나라면, 어차피 물릴게 너무 뻔히 보이기에 

차라리 다른 이들을 살리기 위해 유인하다 멋있는 척 마지막을 맞이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내내 들었기에 어떻게든 살려는 아이들을 보며 쉬이 감정이입이 되진 않았다. 



가장 친한 친구나 연인이 좀비에 물리면 내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줄 수 있을까? 

논리적으론 당연히 배척하는 게 맞는데, 감정적으로 그게 될까, 

이런 극단적인 질문에 아무도 쉬이 대답을 못하기에 좀비물이 더 흥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자든 후자든 어떻게든 답을 내고 답답함 혹은 아련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공리주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드라마는 공리주의를 지향하지만 그게 최선일까 하는 물음을 옅게 남긴다. 

평소에 공리주의가 그래도 최선이자 차악이 아니라고 생각해오며 살았는데, 

소중한 사람이 하나둘씩 늘어가니 내가 당사자라면 과연 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든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10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을 치는 선택을 하는데, 그게 내 가족이라면? 

어렵다. 



추악하다,

다만, 주어가 없다.

좀비가 추악한 걸까, 

좀비 앞에서 혼비백산하며 아등바등 발버둥 치는 우리가 추악한 걸까,

결국 서로에게 거울 같은 존재이진 않을까, 








때론 좀비처럼 살고 싶을 때가 있다. 

고민하지 않고 시키는 것만 하며 영혼이 없는 듯 연명하며,

이제 그런 삶은 생산적이지 않다, 의미 없는 것이다라며 치부하고 싶지 않다.

죽은 듯이 살아야 사는 거 같을 수도,

그것이 어쩌면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의지의 진심 어린 발현일 수도,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내 모습일 수도..


작가의 이전글 [감상] Step by step,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