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은 학교 다닐 때나 회사 다닐 때나 근본적으로 불안감이 있는 것 같다. 돈 있어도 불안, 없어도 불안, 좋은 학교 나와도 불안, 못 나와도 불안. 뭔가 남에게 뒤지지 않게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어렸을 때부터 깔려있었던 지라 생기는 불안감이겠지. 한국사회가 조장한 것. 그래서 이 사회를 벗어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여기를 벗어나면 뭔가 불안한 기분이 없어질 것 같은 예감도 들고.
나도 그랬고.
사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에선 외국 나오면 안 된다. 그렇게 불안해서 외국 나왔는데 나오면 더 불안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불안감은 한국 있을 때보다 외국 살 때 한... 45% 정도 더 느낀다고 보면 맞다. 외국말 못하면 곱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국 살 땐 어딜 가나 주목받고 인기도 많았는데 외국 나오니 주목받기는 커녕 어딜 가나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낀다. 그렇다. 누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을 주목하겠는가. 말 못하는데 주목받는 건 갓난쟁이 밖에 없다.
나 외국 여행할 때 전혀 불안하지 않았는데? 먹는 거 잘 먹고 문제 없이 잘 돌아다니고... 외국서 살만하겠드만.
여행자의 입장에서 외국에 잠깐 들린 거랑 외국서 거주지 등록하고 사는 것과는 천지차이다. 외국말이 부족한 상태에서 외국에서 살아 가려면 일상이 모험이다. 집 구하기, 거주지 등록, 핸드폰 계약, 은행계좌 오픈, 전기 등록, 병원 예약, 애가 있다면 학교 등록까지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심지어 아마존에서 물건 주문하는 것도 큰 일처럼 느껴진다. 쉬운 것도 잘 못해내고 사니 내가 정신박약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자존감도 한없이 낮아지고.
시간이 지난다고 독일어 실력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독일 땅에서 몇십 년을 살아도 독일말 제대로 못하는 사람 수두룩 하다. 그나마 좀 젊을 때 와서 빡세게 독일말 배우면 2,3년 지나 병원 가서 의사 앞에서 자기가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문제없이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독일어 실력이 쌓인다. 그 정도 한다고 두 다리 뻗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 이때가 되면 슬슬 다른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니까.
겉도는 외국인이 되고 싶지 않고, 무시받는 외국인이 되고 싶지 않고, 독일인 친구도 많이 사귀어서 독일인처럼 살아야지!
처음 독일 왔을 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를 악물고 독일어를 배우고, 대학엘 들어가고, 친구를 사귀고, 적성에 안 맞는 그룹에 끼어 이리저리 헤매고, 독일애들 파티에 쫓아다니고. 그러다 문득문득 나는 여기서 뭔가? 앞으로 이 짓을 몇 년을 더 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어를 잘하는 것이 문제의 해결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어느 겨울 대학 파티였는데, 애들이 한참 춤을 추다가 디제이가 튼 노래에 맞춰 모두들 노래를 부르는 거였다. 그 노래는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호랑나비나 아파트 같은, 독일에선 모든 국민들이 다 아는 국민가요였던 거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그 노랠 들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좀 얼어붙었던 것 같다. 노래가 끝날 때까지 입도 뻥끗 못하고.
그때 단념을 알았다.
내가 아무리 독일어를 열심히 한다 해도 이건 언어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한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 사이에 공유할 수 있는 문화, 같은 장소에서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는 동질감. 같은 음식을 먹고 비슷한 몸냄새를 풍기는 집단의 동질감. 그렇다. 이건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얻을 수 없다는 거라는 걸 알았다.
독일 산지 20년이 다돼가는 내가 배운 가장 큰 지혜는 이 땅에서 나는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이 땅에서 50년을 산들 나는 계속 외국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독일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어떤 것은 절대 독일인처럼 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오래 산 연륜의 장점은 그들 사이에서 이겨냈거나 잘 융화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단념할 것은 단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할 시간이 있었다는 거다.
그래도 워낙에 태생이 튀고 싶은 한국인인 지라 다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고 그 욕심은 불안을 만들어낸다. 학부모 회의에서도 존재감을 남기고 싶고, 회사에서도 문법이 훌륭한 이메일을 쓰고 싶고, 시어른께도 독일인 며느리 못지않은 독일 요리를 선보이고 싶다. 그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늦은 나이에 독일 와서 풍토가 안 맞는 독일 땅에서 숨 쉬고 사는 것만으로도 한국 사는 것보다 스트레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