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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Oct 06. 2021

카파도키아에서 만난 진정한 노마드

룸 메이트 인 코세 펜션

어제 앙카라에서 괴레메로 넘어왔다. 터키에서 최초 2박은 앙카라 시내 한복판에 있는 바하르 호텔에서 했는데 예약도 안하고 무작정 걷다가  들어간 호텔치곤 꽤 좋았다. 부킹 닷컴에서 9점을 수령했다는 스티커를 자랑삼아 문앞에 붙여둔 깨끗한 신식 호텔이었는데 점수 만큼이나 깨끗하고 시설도 좋았다. 게다가 현재 터키 리라가 폭락하는 바람에 믿을 수 없는 가격(1유로에 10리라. 3년전만 해도 1유로에 6리라였고, 8년전만 해도 1유로에 2,5리라였는데)인 단돈 15유로를 지불하고 들어왔다.


시설은 좋았지만 있다보면 발코니도 없고 얘기나눌 상대도 없어 꼭 시설좋은 독방 감옥에 있는 것 같았다. 심심했다. 그래서 나는 하루종일 앙카라 시내를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어둑신 해서야 호텔로 돌아와 유튜브를 2시간 보다 잠들었다. 여기 있으면서 괴레메로 가면 시설은 후지더라도 도미토리에 머물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곳이 코세 펜션이었다. 4인용 도미토리 침대 한 에 단돈 7유로. 가난한 백패커들이 즐겨찾는 곳이다.


펜션 입구
나의 방. 모든 시설들이 저렴. 방문은 얇은 합판. 그마저도 문을 열면 끼익 소리가 남. 공동 샤워실의 나무문은 아래가 이미 썩어서 거뭇거뭇함. 그래도 1박에 7유로라 눈감아 줌.

얼마만에 와보는 도미토리이냐. 그간 나이들었다고 여행을 해도 도미토리에서 자는 일은 없었는데 거의 20년만에 처음이다.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확 줄어 설사 4인용이라고 하지만 나 혼자 잘 수도 있다. 방에 들어와보니 내 침대 맞은 편에 누군가의 짐이 있었다. 내가 체크인 한 시간이 오후 6시. 곧 방순이가 들어올 시간이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방순이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라,  얘가 밤 10시가 되도록 들어오질 않는다.


나이트엘 갔나?


걸어놓은 옷을 보니 옷은 대충 아무 거나 집어 입는 나와 비슷한 스타일 같은데... 무엇보다 있어야할 백팩이나 캐리어가 보이지 않았다. 옷가지 몇 개가 들어있는 작은 가방(크로스 백)이 전부였다. 나는 가 늦게까지 안들어오자 백팩을 메고 이웃마을로 여행을 떠났다가 거기서 1박을 하고 오는 모양인가 싶어 슬슬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밤 10시 30분.


갑자기 방문이 열리더니 거무튀튀한 것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였다. 한 마흔 살 돼보이는 아시아계. 일본 사람인가? 남미 사람인가? 아니면 남태평양? 수염을 깍지 않고 작고 땅딸막 한 그의 얼굴을 보며 나름대로 출신지를 점쳐보았...


아니 그 이전에 아니 리셉션 맨이 미친 거 아니야? 터키에서 이렇게 혼탕으로 방을 줘도 되나 싶었다. 터키가 어떤 곳인가? 다른 모슬렘 국가들에 비해 많이 개방되었다고는 하나 아직도 시골에 가보면 남자가 노는 물과 여자가 노는 물이 다르다. 찻집에는 순 남탕이다. 버스에서는 생판 모르는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앉을 수 없다. 예약 자체를 남자좌석, 여자좌석으로 나눠서 하고 혹시 남녀가 나란히 앉았더라도 차장이 남남 여여로 자리를 바꿔준다. 내가 겪어봐서 안다.


허나. 유럽 배낭여행을 다니다보면 도미토리에 남자방 여자방이 따로 나눠져 있지 않은 곳도 꽤 있다. 나는 왕년에 도미토리에서만 잤던 배낭여행자 출신으로 이 상황을 쿨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왔던 그 역시도 침대에 누워 감자칩을 먹고 있는 한 여자를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그는 카자흐스탄 인이었다. 코로나에 걸린 적이 있어 백신을 접종하지 않았다는 그는 이미 장성한 사춘기 아들 둘을 둔 아버지이자 프리랜서 비디오 기사였다.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출신지를 밝히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실컷 떠들었다.(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얘기는 그가 안탈리아에서 3유로를 내고 싱글룸에서 숙박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나서 나는 이 방에 들어온 이후부터 계속 궁금해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짐은 어디있어?


이게 다야. 짐이 없어.


여벌의 바지 하나, 여벌의 티셔츠 장, 속옷 몇 개, 잠바는 들고 왔다가 생각보다 날씨가 따뜻해서 남한테 줘버렸단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 여행인데 이렇게 동네 마실 나가는 차림으로 다닐 수가 있냔 말이다. 나야말로 짐이라면 간소하게 싸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짐은 나의 반도 안된다. 게다가 신발 좀 보라지. 걸을 일이 많은 여행자가 등산화나 운동화도 아니고 가죽신발...


손에 든 검은 가방만 하나 달랑 들고 다니는 카자흐스탄 남자 바하.

그는 카자흐스탄 방송국에서 카메라 맨으로 일을 했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여행 다큐멘터리를 찍었는데 생각보다 돈이 안되어 직장을 관두고 결혼식이나 돌잔치 비디오를 찍어 돈을 번단다. 우리가 생각하기엔 아무래도 방송국에 소속되어 있으면 수입이 쏠쏠할 것 같지만 카자흐스탄에선 안그렇단다. 떠돌아다니는 것도 좋아하는 터라 프리랜서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러기에는 비디오 촬영일 만큼 안성맞춤인 일도 드물단다. 러시아 어가 통하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터키는 제집처럼 드나들며 일을 하고 미국에서도 꽤 살았다. 미국에선 워킹비자가 안나와 불법으로 막노동을 하며 모은 돈으로 미국 횡단을 해서 미국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을 정도. 떠돌아다닌 경력만큼 친구도 세계곳곳에 많은 모양이었다.


얘기 도중에 나는 자꾸만 그의 거무튀튀한 패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황색 선글래스에 눈길이 갔다. 그랬더니 그는 아, 이거? 하며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아, 이거? 내거 아니야. 한 페이스 북 (여자)친구의 것인데 걔가 내가 괴레메에 있는 걸 알고는 자기가 1주일 전에 어떤 호텔에 선글래스를 두고 왔으니 그것 좀 찾아다가 부쳐달라고 해서 말이지. 얼굴을 본 사이는 아니야. 페이스북 친구일 뿐이지. 헐헐헐.


오지랍도 넓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모난 구석이 없어 처음보는 사이인데도 전혀 어렵거나 어색하지가 않다. 우리는 꽤 오랜 친구처럼 박장대소를 하기도 하고 낄낄거리기도 하며 얘기했다. 그의 핸드폰 속에는 그가 직접 촬영한 재미난 비디오와 사진이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길에 쓰러져 있는 개만한 쥐 사진은 정말이지 신기하고도 웃겼다. 처음에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는 리셉션에 가서 방을 바꿔달라고 얘기할까 싶었는데 얘기를 해보니 사람이 착하고 심성이 바른 것 같아서 그냥 여기서 자기로 했다.


얘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12시가 훌쩍 넘었다. 나는 피곤하니 이제 그만 자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러냐며 자기는 좀 늦게 자는 편이니 옆방에 가서 좀 놀다 오겠다고 했다. 옆방에 러시아 사람들이 셋이 들어왔는데 그들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그는 중요한 물건이 든 까만 비닐봉지를(터키에서 어렵게 장만한 보드카 한 병)손에 들더니 퇴장했다. 


잠은 싼 곳에서만 자고, 물건도 싼 것만 사는 사람이지만 이상하게도 얘기를 해보면 그 사람에게는 궁색한 티가 안났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어우, 쟤는 정말 궁상맞게 다닌다 싶을 정도로 돈돈 하는 여행자들이 있는데 그는 절대 그런 부류는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저렴함은 오히려 매력이었다. 돌아다니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랄까...


아참, 나는 그에게 선물도 하나 받았다. rkiye라고 새겨진 투엑스라지 빨간색 티셔츠. 입을 옷이 없어서 시장에서 2유로 주고 샀는데 마음에 들면 가지라고 했다. 괜찮은 기념품을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긴 좋은데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이걸 내가 왜 받았지? 한다. 이런 걸 자꾸 덥석덥석 받으면 짐이 늘어나서 안된다. 나는 이미 괴레메 기념품 집에서 방만구 씨에게 선물할 양으로 병따게 두 개를 구입하지 않았냔 말이다. 그리하여 이 티셔츠는 여기에 두고 가는 걸로.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입겠지.


대충 다 썼다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중요한 걸 빠뜨렸다. 그가 왜 밤 10시 30분에 돌아왔는지 설명을 해야하는데... 이 글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나도 그렇지만 우리같은 부류는 여행와서 박물관이나 관광명소 같은 데를 찾아 다니지 않는다. 그냥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막 돌아다닌다. 눈에 보이는 산꼭대기엘 올라가기도 하고 지도에 있는 강을 찾아 가기도 하고. 발길 닫는대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기진맥진해서 돌아온다.(우리는 둘다 여행 안내책자를 안들고 다닌다.) 그는 이웃동네까지 풍경에 취해서 발길닫는대로 돌아다니다 어둑신 해지길래 어라, 집에 돌아가야되는데 벌써 어두워졌네 싶었단다. 가장 빠른 길인 국도를 따라 걸어오다 맘씨좋은 터키인이 차에 태워줘서 그나마 밤 10시반에 호텔로 돌아올 수가 있었단다. 나와  비슷한 인간부류를 만나 즐거웠다.


그나저나 나도 여기저기 하루종일 헤매고 돌아다니다거 찍은 사진 몇 장 올린다. 괴레메가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하여. 사실 여긴 3년 전에 왔던 데라 사진도 몇 장 안찍었다. 그래서 사진을 성의없이 찍었는데 궁금하면 카파도키아라고 인터넷에 쳐보시라. 볼만한 사진 거기에  많다.

찻물이 끓는 중. 노부부가 노점에서 토마토 소스와 차를 팔았다. 나는 소스도 저어드리고 나뭇가지도 주워다 드리는 등 한나절을 여기서 보냈다.
토마토 소스를 파시는 부부의 일을 좀 도와드리고 함께 점심식사를 했다. 차도 대접받았는데, 돈을 한사코 거절하셨지만 장삿집에서 얻어 먹는 것은 실례인 것 같아 소정의 답례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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