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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May 24. 2020

뜨게바늘 팔아 월 매출 천오백만 원

조촐한 자영업 경험담

우리 집안은 장사꾼 집안이 아니다. 할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농토를 물려주는 바람에 자식들은 그 농토에 묶여 평생 오도 가도 못하고 농사만 지었지 장사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인생의 대부분을 태어난 곳에서 반경 20킬로미터를 벗어나지 않고 살았다. 부모님 인생에서 딱 한 번 일 년 남짓 장사를 해본 적이 있긴 있었다. 특별한 경험이 없이도 누구나 낼 수 있는 구멍가게. 내가 유치원 다닐 때 친정엄마가 작은 구멍가게를 경영했었다.


구멍가게도 우리 아버지가 건물주였기 때문에 엄두를 내본 것이었으리라. 대도시로 가는 직행버스가 서는 터미널 앞 큰 한옥집에 네 가구가 모여 사는 우리 집이 있었고, 도롯가에 접하여 가게 셋, 그러니까 양복점, 전파상, 약국이 있었다. 양복점 강 씨가 나가자 거기다 아버지는 큰 맘먹고 구멍가게를 차렸다. 금방 닫긴 했지만.


 친정 엄마의 말로는 고만고만한 자식들 넷이 가게를 들락거리며 먹어대는 통에 물건 들여오기가 무섭게 자식들 입속으로 다 들어간다고 했다. 가게를 오픈하고 자식들 등쌀에 내리 적자만 기록하다가 가게를 그만두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내 분석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 가게가 망하고 들어선 동종업계 모레알 상회 아줌마는 10년 이상 그 자리를 지키며 아들 둘을 길렀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30분마다 한 대씩 오는 직행버스가 설 때마다 음료수를 들고 버스 앞으로 가서 승객들에게 음료수를 팔았다. 요즘 말로 공격적인 마케팅을 했던 셈이었다. 그러니 목도 좋았고 월세도 낼 필요가 없었던 구멍가게를 1년도 못하고 닫은 건 부모님의 경영 마인드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부모님 남사스러워서 공격적인 마케팅 못하는 분들이다.


우리 집안이 이렇다. 이러니 내가 장사를 해볼 엄두를 낼 수 있겠는가. 그것도 한국도 아닌 독일에서.


때는 2002년 월드컵이 끝난 다음 해였나. 내가 털실 가게 판매원으로 일할 때였다. 그 일을 하면서 늘 의아한 점이 있었다. 독일에서 뜨개질 용품은 한국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는 것. 가게에서 판매되는 독일제 바늘은 보통  6-7천 원에서 1만 원에 육박하는 것까지 있다. 그에 비해 한국서 유통되는 뜨개바늘은(중국산 OEM) 털실을 사면 공짜로 주거나 단돈 500원에 팔렸다. 물론 독일제가 훌륭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한국산이 형편없는 건 아니었다. 쓸만했다. 그 바늘로 200그램짜리 목도리를 뜨는 동안, 400그램짜리 폰초를 뜨는 동안 어떠한 흠결도 찾아내지 못했다. 심지어 가게 손님들에게 물어봤을 때도 이 정도면 3유로에 기꺼이 사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시계나 저울, 자동차, 압력밥솥, 가방이라면 10배 이상을 주더라도 비싼 물건을 사겠지만, 뜨개바늘을 그렇게까지 비싸게 주고 살 필요가 있을까...


나는 오랜  망설임을 끝내고 독일에서 뜨개바늘 장사를 한번 해보기로 했다.


한국 가는 길에 동대문에 가서 뜨개바늘을 각 두께당 200개씩 구입해서 독일로 부쳤다. 개당 도매가격은 작은 것 150원, 중간 것 300원, 큰 것 500원이니 2000개를 구입해도 100만 원이 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쓰지 않는 작은 방에 사무실을 차렸다. 시청에 가서 사업자 등록도 했다. 시댁에서 가져온 중고 팩스기를 구비하고 전화기는 집전화기를 사무실 겸용으로 해서 썼다. 그리고 디자인에 능통한 방만구 씨를 이용해 회사 로고와 상품 포장디자인을 했다. 상표는 맥스와 써니. 방만구 씨가 디자인한 제품 포장지는 아래와 같다.


자영업을 시작하는 데 있어 자영업자 등록비 20유로와 물건값을 제외하고 든 돈이 거의 없다. 사무용품비, 월세, 통신비, 직원 임금이 거의 나가지 않았으니 아주 실용적인 아이템으로 자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나는 샘플 바늘 두어 개에 컴퓨터로 만든 아마추어 냄새가 물씬 풍기는 카탈로그와 가격표를 함께 넣어 독일 전역에 퍼져있는 뜨게 샵에 보냈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거기 맥스와 써니 바늘인가요?"


친구나 시어머니가 전화한 줄 알고 예사로 전화를 받았는데 고객으로부터 온 전화였다. 바늘을 주문하겠다는 것이었다. 내 심장은 터질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목소리를 친절한 사무 톤으로 바꾸고 고객을 응대했다. 첫 전화를 받은 이후에 나는 혹시 고객이 전화를 걸어올 것에 대비하여 누가 전화를 하든 늘 사무적인 톤으로 바꿔 전화를 받았다.


"구텐 탁, 맥스와 써니 바늘입니다."


때때로 우리 시어머니는 늘 킥킥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다.


"응, 맥스와 써니 바늘이니? ㅋㅋㅋ 느이 남편 좀 바꿔보거라."


주문은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심심찮게 들어왔다. 심지어 뮌헨 한복판 마리엔 플라츠에 위치한 백화점인 루드비히 벡에서도 우리 바늘을 주문했다. 대부분의 뜨개방 주인들이 어르신들이라 그런지 이메일보다 팩스로 늘 주문이 들어왔다. 우리 집 팩스기는 두루마리 종이를 장착한 구형이었다. 한 번은 하루종일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왔는데 팩스기에 1미터도 넘게 종이가 방바닥까지 늘어 뜨려 져 있었다. 주문표를 보니 총금액이 백만 원은 족히 될 성싶었다. 나는 백만 원짜리 로또에 당첨된 듯 기뻤다.


주문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져서 나는 톰 존스 It's not Unusual 이란 노래를 아주 크게 틀어 놓고 춤을 추며 바늘을 포장했다. 한국에서 사 가지고 온 바늘은 100개 단위로 포장이 되어있어 나는 우리 회사의 로고가 들어간 포장지를 비닐봉지에 넣고 일일이 손으로 포장을 해야 했는데, 그 단순하고도 지루한 작업이 너무 재미있었다. 주문이 많을 때에는 2시간 넘게 포장해야 할 때도 있었지만 늘 콧노래를 부르며 일했다.


150원에 사 온 바늘의 도매가격은 1,65유로(부가세 포함, 2천 원선), 소매가격은 3,95유로(부가세 포함, 5천 원선). 너무 비싸게 파는 거 아니냐고 하시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다.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 당시 뜨개방에는 아주 싼 바늘이 아예 유통되지 않았다. 독일제 쇠바늘은 소비자 가격 개당 7천 원 선, 일본제 대나무 바늘은 9천 원 선에 거래되었으니 우리도 그에 발맞추려면 그래도 소비자 가격 4천 원 이상은 받아야 했다. 상품이라는 것이 싸다고 무조건 팔리는 것이 아니다. 동종에 비해 너무 싸면 오히려 아무도 안 산다. 내가 받은 도매가격은 당시 독일 뜨게바늘 시장 물가를 고려한 적정 가격이었다.


뜨개바늘은 이문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첫 달에 30만 원 정도의 매상을 올리게 되자 나는 전화마케팅을 하면 좀 더 팔리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하여 뜨게 샵에 직접 전화해서 물건을 써봤는지 물어보고 혹시 우리 바늘로 신상 프로모션을 하고 싶으시다면 할인가로 드리겠다는 제의를 해보았다. 그랬더니 주문이 점점 더 늘기 시작하여 첫 해 겨울에는 내 월급에근접한 매상을 올리게 되었다.


방만구 씨와 시댁 식구들은 깜짝 놀랐다. 그분들은 일단은 나의 장사 수완을 못 믿었고, 그 다음은 한국산 뜨개바늘의 품질을 못 믿었던 것이다. 방만구 씨는 망할 것 같던 장사가 생각보다 수입이 쏠쏠하니 집 근처 사업단지 내에 창고와 사무실을 빌리고 종류를 늘려 본격적으로 장사를 한번 해보자고 제의했다. 방 하나가 남아 도는데 뭐하러 가욋돈을 쓰는가 싶어 사무실을 빌리지 않았다. 다음 해, 매상이 내 월급 몇 배를 훌쩍 넘어섰을 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근처 산업단지에 사무실을 얻어 방만구 씨와 장사를 시작했다. 대나무 뜨개바늘에서 종류를 늘려 장갑 바늘, 쇠바늘, 각종 뜨게 부속품, 코바늘까지 취급했고 거래처도 한국, 중국, 일본으로 늘렸다. 일제 튤립 바늘 독일 대리점을 우리가 했었다.(튤립 바늘은 거의 안 팔렸음.)


여름에는 매출이 저조했지만 잘 될 때는 겨울 한 달 매상이 천만 원이 훌쩍 넘을 때도 많았다. 어느 겨울엔 마침 8mm 장갑 바늘로 하는 뜨개질이 폭풍처럼 유행이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바늘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통장잔고가 쑥쑥 올라가 있었다. 이렇게 쉽게 돈을 벌다니! 믿기 힘들 지경이었다. 겨울 한 달 매상이 천오백만 원을 넘어섰던 해, 우리는 4년간 타고 다니던 소형차 닛산 미크라를 처분하고 신형 폭스바겐 골프를 샀다. 일시불로.


바로 그때 미나가 태어났다. 미나가 태어났을 때 우리는 이것저것 아기용품을 많이 구입했지만 폭스바겐 골프가 그중 제일 비싼 것이었다.


미나가 태어나고 나는 집에서 육아를 하면서 일은 방만구 씨에게 맡겼는데 끝날 것 같지 않던 돈잔치가 사업 4년이 지나자 서서히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분석했던 매출 하락 요인은 아래와 같았다.


1. 우리 바늘과 비슷한 종류의 바늘이 중국 현지에서 중간 상인을 통하지 않고 이베이나 아마존을 통해 팔렸다. 공장도 가격에.

2. 우리 바늘과 비슷한 종류의 중국산 바늘이 싼 값에 쾰른 손공예 박람회장에서 소개되었다.

3. 유럽의 유명 털실 브랜드(라나 그로싸)가 실을 사면 바늘을 끼워주는 마케팅을 하는 바람에 많은 영세 뜨개바늘 업체들이 피를 보았다.

4.  마지막으로 독일의 슈퍼마켓 체인 알디에서 겨울이 시작되기 전 털실과 바늘 세트를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했다.


이중 특히 슈퍼마켓 체인 알디에서 털실과 바늘 세트를 시중가의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파는 바람에 수많은 영세 뜨개방들이 타격을 받았다. 그 시절 우리의 고객이었던 수많은 뜨개방들 중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20%나 될까 모르겠다. 이리하여 우리 '맥스와 써니' 바늘은 정점을 찍은 후 빠르게 몰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선택은 월급 노동자가 되는 길 밖에 없었다. 우리가 고른 아이템은 롱런하기가 힘든 아이템이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맥스와 써니가 할퀴고 간 흔적은 아주 크게 남았다.


이까짓 월급 일주일만 일해도 벌겠네!


늘 이런 식이었다. 우리의 돈벌이에 대한 생각은 늘 폭스바겐 골프를 일시불로 샀을 때에 머물러 있었다. 4,5년간 놀멘 놀멘 큰 힘 들이지 않고 많은 돈을 벌었으므로 웬만한 곳엔 취업하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력서를 쓰다가도 한숨이 나와 이까짓 쥐꼬리만 한 월급 차라리 안 벌고 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업이 망해감을 체감하면서도 취업을 차일피일 미루었고, 그 사이 마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통장도 차차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교외에 사려고 봐 둔 신축 타운하우스도 망설이다 결국 불안정한 수입 때문에 포기했다.


사실 이것은 미래에 닥쳐올 불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영업 시작 당시 석사를 마치고 중국 회사에서 경력을 막 시작했던 방만구 씨는 장사를 하느라 옳다구나 회사를 그만두었는데 그것은 그의 경력에 큰 타격이 되었다. 전공도 안 좋은 데다 사회생활 초기에 생긴 5년의 경력 손실은 그 무엇으로도 메꾸기가 어려웠다. 그는 사업이 망하고 난 이후 대졸자라는 학위에 훨씬 못 미치는 직장에서 일해야 했다.


사람에게는 세 번의 기회가 온다고 했다. 오십 인생을 산 내가 생각해 보면 그때가 내게 찾아온 기회 중 한 번이 아니었나 싶다. 그릇이 작고 대범하지 못하여 큰 일 벌일 깜냥이 안 되는 내가 우연히 장사를 시작한 것이며, 팔릴 것 같지 않던 뜨개바늘이 어떻게 때를 잘 만나 내게 한 달에 천오백만 원의 수입을 안겨준 것이며, 돈잔치를 할 무렵에 미나까지 덩달아 태어난 것이며. 그 시기는 잠깐 내 인생에서 맛본 꿀물 같은 것이었다.


 시절은 요즘에 비해 장사하기가 좀 헐렁한 시절이었다. 비자 따기가 힘들어 한국인들이 요즘처럼 독일로 쏟아 들어오지 못했고, 구매대행 업체들이 생기기도 전이었다. 바람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한 유학생이 브랜드 압력솥과 냄비를 한국에 팔아 집을 샀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겨우 15년이 흘렀을 뿐이지만 요즘은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대부분 물건은 알리바바나 아마존, 이베이에서 중간 상인을 통하지 않고 중국에서 직배송되는 시대다. 구매대행업이 들불처럼 일어나 웬만한 외제 물건은 중간상인 없이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나처럼 어중띠게 시작해서 소발에 쥐잡기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가 아직 장사를 접은 것은 아니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직도 의리를 지키고 주문을 해주는 고객이 딱 한 분 남아 있어서다. 이분은 1년에 네댓 번 주문을 한다.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 인보이스의 번호를 보면 알 것이다. 자신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고객임을.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꼭 주문이 들어오는데 나는 이분의 주문이 꼭 산타의 선물처럼 반갑다. 이분과의 의리 때문에 장사를 접기가 미안하다. 이사를 하는 동안 보관할 장소가 없어 대부분의 뜨개바늘을 버렸다. 아직 남아있는 20 여 박스의 뜨개바늘은 혹시라도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고객인 이분께 선물로 드리고 싶다.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했는데 죄송하지만 사양합니다, 하면 내 꼴이 좀 우스워지겠지만.



사은 행사안내 :

독일에 거주하시는 분들 중 아래의 바늘이 필요하신 분들께 선착순 100분께 무료로 바늘을 배송합니다. 독일에 사시는 친인척 분들께도 널리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론 배송비는 자가부담.


뜨게바늘 4mm-12mm

코바늘 1mm-12mm

장갑바늘 2mm-12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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