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막 돌아온 참이다. 날씨가 서늘한데도 셔츠가 땀에 절어 눅눅하다. 발바닥과 종아리도 쑤셔댄다. 오늘도 아침 여섯 시부터 정오까지 여섯 시간을 내리 서서 일했다. 독일 온 지 어언 10년, 직장 생활하다가 관두고 애 낳고 기르느라. 몇 년 집에서 지내다 보니 마땅히 취직할 곳이 없었다. 게다가 아이를 하루 종일 어린이집에 맡겨 놓는 것도 뭣해서 오전 중에 일이 끝나는 직장을 구하려니 더더욱.
그렇게 무려 삼 개월씩이나 직장을 찾아 헤맨 끝에 집 근처 호텔에서 겨우 일하게 되었다. 모텔 원이라는 독일의 호텔 체인점에서. 힐튼이나 홀리데이 인처럼 세계적으로 큰 호텔 체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독일과 유럽에 70여개 호텔을 가지고 있는 규모가 있는 호텔이었다. 가격은 이비스 급으로 비싸지 않은 캐주얼 호텔 되겠다.
이런 호텔 체인점에서 호텔교육도 안받고 서비스직 경험도 전무한데다 나이까지 많은 나를 뽑아줄까 싶었는데, 뽑아줬다. 대면 서비스 직이 다 그렇듯이 임금은 쥐꼬리 수준. 그 돈을 받고 나이 마흔이나 되어 내가 하는 일은 손님들의 아침 뷔페를 준비하고, 식탁을 닦고, 접시를 나르는 일, 쉽게 말해서 서빙이다. 손님이 300명이 넘는 날은 죽음이다. 6시간 내내 쉴 틈이 없이 접시를 날라야 한다. 모두들 내가 독일 가서 호강하고 사는 줄 알지 이렇게 발바닥 부르트도록 일하고 사는지 알기나 할까.
혼자 있을 땐 이 나이에 대학까지 졸업해서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겠냐고 투덜거리지만 친정엄마한테 전화라도 하는 날엔 나의 직장은 황금 직장으로 바뀐다. 유럽에서 아주 유명한 호텔이고, 보너스도 많고 직원 혜택도 많은 데다 유니폼도 멋지다고. 지난달엔 베를린의 같은 호텔 체인점에서 공짜로 2박 3일 묵었다고. 직원이라고 가족실까지 내주더라고.
"엄마, 그래도 나나 되니까 이 정도 직장에서 일하는 거야!"
이것은 외국 가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부풀려지는지에 대한 좋은 예다. 1차적으로 내게서 부풀려진 이야기는 2차적으로 우리 엄마의 입을 타고 더 부풀려진다. 그리하여 머지않아 내 고향사람들은 내가 어느 유명 호텔의 매니저가 되었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호텔을 세웠다고 믿을지도) 이 가정은 절대 과장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겪은 적이 있었으므로. 작년에 한국엘 갔을 때, 사촌 오빠가 대뜸 물었다.
"느이 시아버지는 중동 송유관을 건설하는 회사 사장이라며?"
그런 얘긴 한 적이 없는데... 사촌오빠는 누구한테서 무슨 얘기를 들은 걸까? 나는 그저 친정엄마한테 시아버지께서 중동에 송유관을 건설하는 회사에서 근무하시다 퇴직하셨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얘기가 여러 입으로 전해지면서 꽤 많이 부풀려진 것 같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외국 나간 사람들의 얘기는 이렇게 어느 정도 부풀려지기 마련이어서 우리 집안에도 위대하신 분들이 적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여 국내 명문대학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명하다는 대학에서 유학하여 현재 미국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친정엄마의 사촌동생이 있다. 게다가 그분의 남동생 또한 미국 유명대학에서 날씨를 공부하여 토네이도가 몰아치는 날이면 자동차를 타고 토네이도를 따라다니며 연구를 한다고 들었다. 또 다른 친척중 하나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령 충만한 삶을 살다가 목사가 되어 남미의 어느 가난한 나라에서 학교를 짓고 사람들을 교화하여 그 나라에서 대통령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는다고 들었다.
나만 빼고 다 잘 나가나? 나는 종일 서있어 아픈 발바닥을 만지작 거리며 다들 외국에서 난다 긴다 잘 나가는데 나만 요 모양으로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다 문득 혜경이 이모를 떠올렸다. 아, 그렇지. 혜경이 이모가 있었지. 이모 역시 친정엄마의 사촌동생으로 내가 어려서 친이모처럼 따랐던 분이다. 얼마 전 참으로 오랜만에 이모와 소식이 닿았다. 이모의 이민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내 마음 한 켠에 아직도 남아있는 이모의 모습을 좀 적어 보려고 한다.
혜경이 이모를 떠올리면 영화 포스터처럼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다. 장소는 당시 혜경이 이모가 살았던 경주 근처의 조그만 소읍 건천, 그중에서도 시내 중심가 학생백화점 앞. 건천에 살지 않는 내가 그날 왜 거기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학생백화점 앞을 지나다 우연히 혜경이 이모를 보았다.
아!
이모는 그림처럼 예쁘게 화장을 하고 멋진 유니폼을 입고 팔을 힘차게 저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이모는 화장품 회사 외판원을 하고 있었는데 키가 크고 늘씬한 이모에게 화장품 회사의 남색 유니폼이 어찌나 잘 어울리던지, 화장품이 든 각진 가방은 또 어찌나 멋지던지, 당시 유행을 선도했던 담백한 타입의 분홍색 립스틱을 바른 이모의 입술은 또 얼마나 매력적이던지...
"은지 어디 가뉘?"
이모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이렇게 물었었다. 나는 유명 화장품 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하는 이모가 너무 멋지고 자랑스러워서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 이후로이모를 여러 번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내게 저장된 이모의 모습은 화장품 가방을 들고 남색 유니폼을 입고 힘차게 걸어가던 그 모습이다.
엄마를 통해 들리는 이모의 소식은 화장품 외판원으로 시작하여 식당도 했었고, 백화점에서 이불도 팔았으며, 아파트에서 어린이집도 했었다. 늘 의욕적으로 무언가를 시작했지만 돈벌이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탓에 사는 것이 쪼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모는 중학생이 된 아이 둘을 데리고 미국으로 훌쩍 떠났고 그 뒤로는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했던가.
작년, 내가 한국에 갔을 때 어렵사리 이모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 우연히 이모가 친정집에 전화를 했는데 거기서 내가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동생네서 묵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동생네로 전화를 한 것이다. 이모의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없었다. 나는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사는 얘기를 물어보기가 그랬다. 남들처럼 풍족하게 많은 돈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 아님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이렇게 꺼냈다.
"이모, 미국서 꽤 살았다던데 그럼 영어 잘하겠네?"
"영어야 여기서 살려면 해야 되니까 먹고살 만큼은 배웠지."
이렇게 사는 얘기가 시작됐는데 생각보다 이모의 미국 생활은 수월하게 잘 풀리고 있는 듯했다. 애들은 둘 다 대학에 들어갔고 돈도 부지런히 벌어서 얼마 전에 삼층집을 하나 샀다고 했다. 이제 애들도 다 커서 대학엘 가고 구입한 삼층집에 미국으로 어학연수 오는 학생들에게 세를 줄 계획이란다. 우리 이모 미국서 사는 게 체질에 맞는 모양이다. 맨몸으로 미국 가서 애들 대학보내고 집샀으면 성공한 거지.
"이모, 뭐해서 그렇게 돈을 벌었어?"
"웨이트리스 했지. 미국에선 일한 수당 외에 팁이 있어서 웨이트리스해도 먹고살만해."
현지 상황에 대해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조그만 식당이라도 하나 차렸다고 뻥을 쳐도 아는 사람 하나 없으련만... 솔직한 우리 이모. 미국에서도 씩씩하고 당당하게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이모가 자랑스러웠다. 외국 나가서 피아니스트로, 목사로 성공한 다른 친척들의 얘기보다 나는 우리 이모의 이야기가 훨씬 더 가슴 찡하게 와 닿았다. 이모처럼 외국에서 살고 있는 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닮고 싶은 사람은 그래서 바로 우리 혜경이 이모다. 외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넘어지고 자빠지고 무시당해도 다시 일어나는 잡초 같은 생명력을 가진 사람, 혜경이 이모.
전화를 끊고 나는 갑자기 이모가 보고 싶어 졌다.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했다. 이모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미국에 가본 적이 없으므로 내 상상 속 이모의 모습은 미국 영화에 나오는 웨이트리스의 모습, 델마와 루이즈의 루이즈처럼 당당한 여자, 인근 레스토랑에서 팁을 제일로 많이 받는 인기 있는 웨이트리스. 이모의 모습을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부풀려서 어쩌면 나도 다른 사람한테 우리 이모의 얘기를 이렇게 할지도 모른다.
"우리 이모는 무일푼으로 애들 둘 데리고 미국 갔는데 말이야, 거기서 웨이트리스로 돈을 벌어 애들 둘 대학까지 보냈대. 애들은 둘 다 미국 명문대 생이지. 우리 이모가 형편이 안돼 대학을 못 가서 그렇지 어려서부터 명석했거든. 삼층짜리 으리으리한 주택에서 살고 있으니 아마 지금쯤 식당을 개업해서 식당 주인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그 이모가 원래 사업 감각이 좀 있었는데 한국에선 하는 것 마다 족족 망하더니, 미국 가더니 물 만난 고기가 됐지 뭐야. 사람은 역시 우리 이모처럼 큰 물에서 놀아야 크게 되는 법이지. 아무튼 난 사람이야."
듣는 사람이야 믿거나 말거나 나혼자 신나서 침튀기며 얘기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안다. 듣는 사람이 대충 감안해서 듣는다는 것을. 이민간 사람들의 이런 비슷한 얘기가 어디 한 두 건이라야 말이지.
PS. 이 글은 내가 10년 전쯤에 쓴 글이다. 당시 서빙 일이 체력적으로 너무 힘들어 그만두고 직업교육을 받은 후 지금은 조금 편한 곳에서 일한다. 직업교육은 회계 소프트웨어 쪽으로 배웠는데 우리 친정엄마는 그게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들한테 독일사는 딸내미가 회계사라고 말하고 다닌다. 회계사 시다바리도 못되니까 나가서 그런 소리 하고 다니지 말라고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