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와도 계속 일하고 있습니다
식충이 근성이 있어서 일안하면 종일 빈둥거릴게 뻔하거든요
나는 7년째 우리 회사에서 근무중이다. 내가 하는 일은 정말이지 내가 평생 해본적 없는, 게다가 적성에도 안맞는 일이다. 사무직. 나도 내가 늙으막에, 그것도 한국도 아닌 독일에서 이런 일을 하고 살아가게될지 몰랐다.
한국에 있을 땐 출퇴근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운 잡지사 기자로 일했었는데, 몇 년 일하다 보니 마침 우후죽순처럼 케이블 방송국이 개국을 하는 바람에 많은 잡지사 기자들이 케이블 방송국으로 우루루 이직을 했고, 나도 그 바람을 타고 이직했다. 케이블 방송국에서도 잡지사마냥 일정한 출퇴근 시간 없이 일을 했었다. 밤을 새고 새벽에 퇴근할 때도 있었고 늦은 오후에 출근할 때도 있었고 출근을 안하는 날도 있었다. 당시 케이블 방송 시청률이 0,1퍼센트도 안나올때라 시청률에 대한 부담없이 원고를 썼었다. 그 이후엔 여행을 다니려고 직장을 아예 그만두고 이태원에 있는 꽤 유명한 독일 펍에서 바텐더로 일했다.
아마 그 술집에서 일했을 때가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시기에 나는 주말이면 빽빽해서 발붙일 데도 없는, 외국인으로 가득찬 인기있는 펍에서(그 펍이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때 론리 플래닛에도 나왔던 걸로 안다)하루에 2500원짜리 맥주(Happy Hour엔 단돈 1500원)를 아마 천 잔 이상 따르면서 일했다. 노는 것처럼 일하며 살았다. 일이 끝나면 술마시면서 당구를 치거나 춤추러 다녔다.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자기계발이니 어학연수니 자격증이니 이런 건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내일이 없을 것 처럼 후회없이 놀았다. 일이 육체적으로는 조금 힘들긴 했는데 그땐 체력이 왕성했을 때였으니 힘들다는 건 거의 못느꼈고 하루하루를 그저 최선을 다해 놀 뿐이었다.
월급도 적은 편이 아니었다. 맥도날드 시급의 두 배 이상을 받았었다. 가게 매상이 쏠쏠해 사장님이 회식비를 늘 넉넉하게 주시는데다 식사는 가게에서 했으므로 무엇보다 돈 쓸 일이 없었다.그래서 돈은 회사다닐 때보다 적게 벌었지만 저금하는 금액은 더 많았다. 아참, 팁도 넉넉하게 받아서 그것으로 나는 늘 새벽이 올때까지 놀다가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호사를 누렸다. 그 펍에서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진 각국에서 온 외국인들로 심심할 날이 없었다. 그때 그렇게 미친듯 놀아서 지금도 못 놀았던 청춘에 대한 미련은 없다.
이런 놀순이가 독일에 온 이후 중년에 심심한 사무직 직원이 되었다.
우리 회사는 동서 유럽에 꽤 이름있는 의류매장을 여럿 가지고 있는 리테일 회사이다. 나는 그 매장들의 중앙본부로 들어오는 모든 인보이스들을 컨트롤하고 회계시스템에 입력하고 지불하는 일을 한다. 성수기에는 한 달에 인보이스가 1.000개가 넘을 때가 많다. 물론 요즘은 회계시스템이 많이 좋아져서 기계가 다 알아서 인보이스의 정보들을 읽어 자동으로 시스템에 입력되어지고 나는 클릭 몇 번으로 몇 백 개의 송금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넋놓고 앉아서 놀수만은 없다. 기계도 때때로 엉뚱한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인보이스가 오염되었거나 이물질이 묻어있을 경우 황당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인보이스가 너무나 멀쩡한데도 지 멋대로 이상한 숫자를 입력하기도 한다. 이런 오타가 난 인보이스들은 내가 걸러내고 수정해야한다. 놀랍겠지만 요즘에도 손으로 인보이스를 작성하는 업체들이 더러 있어 그런 인보이스를 받을때마다 나는 일일이 인보이스 정보를 손으로 입력해야한다. 사실 나는 1년전까지만 해도 손으로 인보이스 정보를 일일이 입력하는 회계시스템을 쓰다가 얼마전 이 회계시스템 접했다. 그땐 어머, 요즘 기계들이 이렇게나 똑똑해지는거니? 이런 걸 인공지능이라고 하나? 하고 깜짝 놀랐다. 이대로 가다간 아마 10년 후 나의 노동은 기계로 대체되고 나는 실업자가 되지않을까 싶다.
어쨌든. 처음에 일을 시작했던 3년은 너무너무 힘들었다. 독일어도 딸려서 중요한 서류를 이해하지 못했고, 문서를 작성하는데, 이메일을 쓰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고, 무엇보다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그렇게 많은 서류들을 읽고 분류하고 정리하고 철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일은 그렇다 쳐도 독일어가 완벽하지 않은 나를 뽑은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상사가 하나 있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칭찬받고 싶은 본성을 가진 내게 늘 불편한 사실이었다. 불편할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사실이었다. 왜인고 하니, 내가 일했던 대부분의 직장에서 나는 늘 상사의 총애을 받았기 때문이다. 4형제중 셋째로 태어나 집에서 내 위치는 어중띠긴 했지만 나는 엄마, 아빠의 기대와 이쁨을 제일 많이 받는 아이였고, 이쁨을 받는 것이 습관이 되다보니 학교에서도 선생님께 이쁨을 받았었고 그것은 직장생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그것은 딱 한국에서까지였다.
독일 직장생활에선 모든 사람들이 나를 지적하고 타박하고 눈치를 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지적을 받으려나, 오늘은 또 내가 무슨 잘못을 하게될까 이런 생각으로 출근길이 늘 불안했다. 특히 나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그 상사때문에 나는 첫 2년동안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많이'라고 써놓고 이렇게 평범한 단어로 나의 마음고생, 힘듦을 표현해도 될까 생각하는 중이다) 그래서 휴가를 가지거나 긴 휴일이라도 보낼라치면 긴장이 갑자기 풀리고 열이 나서 자리보전하고 누운 적이 여러 번이었다.
한 번은 마요르카로 휴가를 갔는데 휴가간 다음날부터 열이 나기 시작해서 휴가가 끝나갈 무렵 몸이 회복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바닷물에 발 한 번 담가보지 못하고 비행기타고 돌아왔다. 입사후 첫 2년 나의 휴가는 늘 그런 식이었다. 휴일이 겹쳐 3-4일간 쉬는 날이 오면 나는 자주 열병에 걸려 휴일내내 열병과 씨름하다 퀭한 얼굴로 몸이 회복되지도 않은채 출근하곤 했다.
내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살아가는 느낌이었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칭찬을 받고 살고픈 1인이므로 힘들다고 일을 그만둘 순 없었다. 남편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시부모님께도 친정부모님께도 내가 직장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나 이런 사람이니 칭찬좀 해줘야 하는 거 아냐? 하고 말하고 싶었다. 요즘같은 세상에 너는 니 맘대로 살지도 못하고 남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사니? 하고 묻는 사람도 있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싶다. 내 개인의 욕구와 지나치게 상반되지 않는다면 타인의 칭찬과 인정은 내 삶의 원동력이 되므로.
3년이 지나니 일도 점점 익숙해지고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도 많이 달라지고 회사동료와 마찰은 거의 없어졌지만 그때쯤 슬럼프가 왔다. 첫 3년동안엔 몸과 마음이 힘들었지만 단 한번도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힘든 고비가 끝나자 슬럼프가 와서 회사 다니기가 싫었다. 번아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증상들이 나타났다. 어느날은 자동차를 타고 퇴근하다 신호등 앞에 정차를 했는데 창밖으로 옥수수 밭이 보였다. 그때 내 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내가 왜 뭣때문에 여기 정차선 앞에 서있어야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문을 열고 횡단보도를 건너 옥수수밭 속으로 들어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성피로도 나를 괴롭히는 것중 최고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싫고 이대로 소파 안으로 침잠해버리고만 싶었다. 배가 조금만 아프면 그 이유로 회사를 안갔고, 눈이 약간만 부어도 회사엘 안갔고, 머리가 아파도 회사엘 안갔다. 독일에선 주치의에게 아프다, 감기다라는 이유로 진단서를 끊어달라고 하면 군말 안하고 진단서를 끊어준다. 다른 직원들에 비해 병가가 많았지만 회사에서 내게 눈치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때쯤 나는 회사에서 어느정도 궤도에 올라 상사의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상습적으로 결근을 하다가…
이렇게는 못살 것 같아서 상사에게 말했다.
3개월의 휴가가 필요하다고.
누울 자리 보고 발뻗는다고 될성싶으니 그런 말을 했을 것 아닌가. 유급이든 무급이든 상관없으니 3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그러면 나는 배낭을 하나 메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돌아올 것이고 그 후부턴 마음잡고 열심히 일할 것이라고. 그때 당시에 우리 회계부서에 한 사람이 퇴사를 했는데 여러 달째 새 직원을 뽑지 못했던 터라 나의 제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신 니가 원한다면 출장명목으로 매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네덜란드든 벨기에든 오스트리아든 스위스든 보내줄테니 거기서 1주일이내로 쉬고 오라고 했다. 마음은 감사하나 그것으론 부족했다. 나는 유럽을, 도시를 떠나고 싶었다. 떠나서 터키, 이란, 조지아 중앙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산과 들을 보고 싶었다.
결국 부족하나마 월차를 3주 내서 터키를 돌아다니다 왔다. 결혼하고나서, 애낳고 나서 처음으로 혼자 시간을 가졌다. 3주간 터키 방방곡곡을 돌아다니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첫 3년은 몸에 맞지 않는 사무직에 적응하느라 그렇게 힘들게 살았고, 다음 3년은 그 후유증으로 온 번아웃과 난생 처음으로 맞이한 갱년기때문에 힘들었다. 7년은 2555일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날마다 규칙적으로 뭔가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을 어느정도 길들이는 효과가 있는 모양일까. 야생마를 몇 년동안 마굿간에서 살게 하면 성질이 좀 죽듯이.
번아웃이 일하는 사이에 저절로 없어진 것일까, 아니면 내가 적응을 한 것일까. 터키여행을 다녀온 이후론 피곤하다, 귀찮다, 그만두고싶다, 돌아다니고 싶다 라는 마음은 많이 줄어들었다. 아직도 회사엘 가기 싫은 날이 있지만 그러려니 하고 습관적으로 일어나 회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예전에 엄마랑 땡볕에서 옥수수밭을 메다가 그 일이 너무 힘들고 지쳐 내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밭메는 게 힘들지 않아? 옥수수 안 심고 일 안 하면 안돼?
그럼 있는 땅을 놀리니? 그냥 하는거지. 하고 싶어도 하고, 하기 싫어도 하고. 세상에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사람은 없어.
그래서 나도 그냥 한다. Keep going. 좀 지친다 싶으면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간다. 그리고 혼자 있고 싶으면 집 근처의 호텔에 가서 혼자 조용히 쉰다. 그러느라 내 월급의 상당부분을 지출하는 것이 사실이고. 글을 쓰고있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큰 돈을 써가며 여행을 다녔던 것도, 혼자 조용히 호텔에 가서 쉬었던 것도 내 깐에는 번아웃을 이겨보겠다는 일종의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의 경우 번아웃은 일을 관두고 집에서 빈둥거린다고 없어질 종류의 것이 아니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그렇게 하면 필시 무기력감에 사로잡혀 식충이로 살아갈 것이 뻔하다. 내가 나를 잘 아는데, 나는 나를 규칙에 얽매여놓고 몸뚱아리를 바쁘게 놀려야하는 사람이다.
장기여행을 다니며 내일이 없을 것처럼 살았던 젊음의 강을 건너 이제 내 나이 오십. 딱 오십이 되니 인생을 보는 눈이 좀 달라졌다. 늙어가는데 노후연금들어야지, 미나 한국으로 유학보내려면 돈 모아야지, 젊었을 때 일했다면 늙어서 쉬겠지만 젊었을 때 놀았으니 늙어서 일해야지. 20대의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50대의 나를 본다면 '너 나 맞니?' 하고 물을 일이다.
얼마전 회사에서 큰 건물을 하나 샀다. 지금 리모델링 중이고 올 연말이 되면 우리는 그 건물로 이사를 들어간다. 회사에서는 나에게 방을 하나 배정해줬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이라 그 소식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임원도 아닌 나한테 개인방을? 다 내 성격과 업무를 고려한 상사의 배려다. 우리 회사는 쉽게 떠나기엔 아주 매력적인 회사다. 일은 좀 많지만 이 회사에 다니면서 늘 직원으로서, 인간으로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명하달 문화도 없고 회식도 없고 야근도 없다. 재택근무를 하고싶으면 집에서 일해도 된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다잡아 먹고 퇴사해야지 하는 생각보다는 새 건물로 들어가게되면 내 방을 어떻게 꾸밀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내 방이라 가슴벅차다.
지금 궁리중이다. 내 방에 가족사진 포스터를 붙여놓을까, 조지 마이클 사진을 (난 중2때부터 지금까지 조지 마이클 덕후이며 매해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를 위해 촛불을 켠다.) 붙여놓을까, 화분을 대짜로 사다가 갖다 놓을까, 음향시스템도 좀 갖춰놓을까...
예전에 털실가게에서 일할때(당시 내 나이 30대), 사장님인 Frau Waberseck(당시 나이 50대 초반, 돌싱)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은지야, 너는 주말에 뭐하니?"
"글쎄요, 뭐 술도 마시고 근교로 여행도 다니고 대중없어요."
"나는 주말에 뭘 해야할지를 모르겠어서 집에 멍청히 앉아있어. 이러다 퇴직하면 심심해서 어떻게 살지"
"그때 되보면 알겠죠. 뭘하고 살아야할지."
나의 시어머니 잉그리드는 왕년에 유방암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다 지금은 일흔이 넘었다. 이제 그만 퇴직하고 연금받으면서 조용하게 사는게 어떠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한다.
"퇴직해서 집에 있으면 내가 뭐하고 살겠니? 긴긴 하루 텔레비전만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심심해서 못산다. 이렇게 늙어도 돈 벌 수 있으니 내 직장이 얼마나 좋니. 그래서 난 노망들거나 죽기전까진 일할 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슬슬 그 길로 가는 것 같다. 나는 혼자서 알뜰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타입이 아니므로 일하러 다니지 않으면 종일 뭐하고 놀아야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혼자있는 걸 선호해서 친구와 만나서 수다떠는 것도 피곤하고, 동호회니 종교단체로 나다니는 것도 싫어한다. 간간히 혼자 여행을 떠날 수도 있겠지만 여행도 하루이틀이고, 그렇게 다닐 돈도 없고, 하루종일 집중하고싶은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뭘하긴 뭘해, 종일 유투브나 보고, 빅뱅 좋아했다가 방탄소년단 좋아했다가 비 좋아했다가 연예인 옮겨다니며 덕질이나 하겠지. 안그러면 드라마보고 예능프로그램 보며 히히닥 거리다가 컴퓨터를 끄고는 또 심심해하겠지. 그거 해봤는데, 그렇게 살면 시간이 얼마나 번개처럼 지나가는지 모른다. 아무리 늙었어도 아무 것도 하는 일 없이 한 달을 보낸다는 것, 1년을 보낸다는 것은 참 공허한 일이다.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이라고 의미있게 시간을 보내는 건 아니다. 별로 하고싶지 않은 일 하면서 시간때우다 오후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일이 뭐가 그리 의미있는 일이겠는가. 그래도 이 직장생활에서 의미를 찾으라면 최소한 아침에 일어나서 어디선가 하루를 보내고 저녁때 집에 돌아오는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다닐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내가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돈은 내가 번다는 부심이 있다. 부모님 용돈 드리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부모님 잘 만나 남자 잘만나 편하게 사는 거 관심없다는 미쓰 에이 노래처럼.
그러니 퇴사를 하네 마네 하는 생각은 접어두고 67세 퇴직때까지 진득하게 엉덩이 의자에 붙여놓고 사는 수 밖에 없다. 사각형 사무실에 갇혀서 67세까지 일하다니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특별한 재주도 없는 내가 안그럼 별 뾰족한 수 있나. 고맙게 생각해야지. 강퇴 안당해도되는 현실을, 특별한 재주도 없는 내가 이렇게 번듯한 직장에서 돈 벌어먹고 사는 사실을. 젊고 실력있는 취준생이 즐비한 이 마당에.
내가 너무 절망적으로 썼나?
PS.
나의 옛 상자 Frau Waberseck은 후에 사업체를 팔고 집을 팔고 스페인인가 어디 남쪽 나라로 가서 남방의 햇빛을 쬐며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햇빛을 쬐는 일도 하루 이틀이지 심심해서 어떻게 살까, 그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