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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Nov 27. 2020

열두 살 미나, 밝은 에너지 덩어리


19시에 퇴근하여 간단히 저녁을 먹고 노닥거리다 보면 벌써 20시30분. 그러면 넷플릭스에서 이미 열 번도 더 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동물 70시리즈 중 해파리 편을 보고 있는 미나를 뚜드려 잡아 자러 보낸다. 애는 서너 번은 가라고 내 입을 닳게한 후에야 밍기적 거리며 일어난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몸을 쓰지 않고 말로써 애를 자러 보내다니… 초등학교 저학년때만 해도 늘 최소 30분은 책을 읽어주거나 레슬링을 해주거나 등을 긁어 줘야만 했던 애가 열두 살이 되고 부터는 혼자 이닦고 자러 가니. 클수록 손이 덜가 키우기가 편해진다.

  

미나가 자러가면 나와 방만구 씨는 넷플릭스에서 좀비영화나 종말영화를 보려고 리모콘을 10분째 이리저리 돌리고 있다. 소파에 앉아서 의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있을 무렵 거실 문이 스르르 열린다. 그리고는 산발을 한 미나가 배추벌레가 기어가듯 바닥을 쓸면서 소파쪽으로 기어온다. 어떨 땐 애가 기어오는 걸 보지 못하고 내 발 아래에 온 이후에야 보고 나는 기겁을 한다. 내가 기겁을 하는 걸 보면 미나는 기분이 좋아져 산발을 하고 쩍벌춤을 춘다. 방만구 씨와 나는 그 꼴을 보고 한 차례 흠뻑 웃는다.


나는 웃으면서 한편으론 이상한 생각이 든다.  


쟤는 왜 저러는 걸까? 걷기도 귀찮은데 왜 기어서 이 방 저 방을 쓸고 다니는 걸까… 기운이 남아도는 걸까? 내가 아이였을 때도 저랬을까?  


우리가 계속 미나의 장단을 맞춰주면 애가 9시가 넘어가도록 잠을 안자니 어쩔 수 없이 위협을 한다. 다시는 거실 근처에 얼씬도 못하도록 쎈 걸로.


„지금부터 무서운 영화 볼거야. 귀신 나올거야.  그러니까 빨리 자러가!“


그러면 미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자러 들어간다. 우리는 미나가 방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5분이상 무슨 영화를 봐야할지 결정을 못하고 리모콘을 여기저기로 돌린다. 그러고 있다보면 또 문이 스르르 열리면서 산발을 한 배추벌레가 들어온다.(이때 무서운 영화가 나오면 미나는 밖에서 머뭇거리며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고 눈치를 보다가 결국 혼자 자러간다.) 이 짓을 한 서너 번 이상은 한 이후에야 미나는 자러 들어간다. 물론 엄마 아빠가 많이 웃을수록 흡족해 하며 발길을 돌린다.


애가 혼자 잠들기엔 심심한 거다. 형제 자매도 없고 침실에는 재미있는 그 어떤 것도 없고. 엄마 아빠는 옆방에서 재미난 뭔가를 할 것 같아서 한 번 가보고 싶고. 미나가 날마다 배추벌레 흉내를 내는 건 아니고, 어떨 땐 미친듯이 춤추면서 들어올 때도 있고, 아빠가 맥주마시는 것을 흉내내면서 들어올 때도 있다. 한 번은 내가 재채기 하는 것 흉내내면서 들어온 적도 있었다. 나의 재채기는 우리집에서 유명하다. 아마 우리 아래윗집, 옆집에서도 나의 지붕이 날아갈 듯한 재채기 소리를 듣고 저것이 과연 인간이 내는 소리인가 하고 의아해할 것이다. 미나는 엄마의 재채기가 너무 가열차서 조금만 발돋움을 하면 날 수도 있을 거라고 하며 과장되게 내 재채기를 흉내낸다. 그러면 방만구 씨는 한 술 더 떠 육중한 몸을 일으켜 재채기 하며 날아가는 흉내를 낸다.  


이렇게 우리 집에서는 미나때문에 하루에 한 번은 적어도 크게 웃을 일이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언젠가부터는 웃음이 사라진다. 살면서 크게 웃을 일도 크게 화낼 일도 없이 무미건조한 일상이 이어진다. 이게 갱년기에 접어든 내 인생인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가식이라곤 하나도 섞이지 않은 미나의 밝은 미소를 보면 나는 깜짝 놀란다.


  

아떻게 저렇게 사소한 일로 저렇게 크게 기뻐하지? 저 아이는 어떻게 매일 저렇게 예쁜 에너지가 철철 흘러넘치는거지? 미나가 없었다면 갱년기의 에너지가 가득한 우리 집안에 밝고 예쁜 에너지가 이렇게 넘칠 수 있을까. 그 에너지는 맑고 깊은 우물처럼 결코 고갈되는 법이 없어 미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우리집 분위기를 좋게 이끌어준다. 노력하지 않아도 생기는 이런 에너지를 가진 아이들은 정말 매력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젊은 엄마였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밝은 에너지를 가진 열두 살 미나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조금 있으면 이 좋은 시절이 사라질 것 같아서 나는 작게 웃을 일도 일부러 크게 웃는다. 크게 웃다보면 웃는게 웃겨 더 크게 웃게된다. 다른 방에서 미나와 방만구 씨가 히히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꼭 달려가서 함께 웃는다.


갱년기의 나는 지금 웃음이 고픈 모양이다.

아이가 축복이다.    


산발을 하고 기어다니고, 쩍벌춤을 추고, 작은 일에도 크게 감탄하며 자지러지던 애가 잠이 들면 또 그렇게 고요할 수가 없다. 미나가 깨어있을 땐 오색으로 빛나던 에너지들이 애가 잠이 들면  미나와 함께 잠이 든다.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아이를 낳기 전엔 아이가 이렇게 예쁜줄 몰랐다. 미나를 낳고나서 보니 세상 아이들이 다 예쁘다. 그리고 어른들도 한때 아이였던 적이 있었던 사람인지라 자세히 보면 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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