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를 더 많이 쓰는 자 더 빨리 늙으리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 자기가 평생 사용할 수 있는 정해진 에너지 양이 있다. 사람마다 가지고 태어나는 에너지의 총량이 약간씩 다를 순 있겠지만, 지구에 석유매장량이 한정적이듯 사람에게도 가지고 태어난 에너지가 한정적이라 그 에너지를 다 써버린다면 에너지 고갈사태가 빚어진다.
아이를 여럿 낳은 여자들은 안낳은 여자보다 더 빨리 늙고, 속썩이는 배우자와 자녀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빨리 늙으며, 평생을 직장생활 하면서 산 사람들이 백수보다 더 빨리 늙는 것 같다. 직장생활하면서 긴장속에서 사는 사람이 집에서 푹 퍼져 사는 사람보다 활기차게 산다고들 하지만 내 경험으론 사실이 아니다. 그 이유는 전자의 에너지 소진이 후자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은 에너지를 방출한다는 의미이고, 에너지 방출의 결과는 에너지 고갈, 그것은 곧 늙음을 의미한다.
그럼 국내 거주자와 해외 이민자 중 누가 더 에너지를 많이 쓸까? 친구들은 직장생활 더러워서 못해먹겠다고, 시댁식구 꼴보기 싫다고, 사교육비 너무 들어가 못살겠다고 이민이나 갈까 하는 애들 꽤 있다. 물론 유럽으로 오면 직장생활이 한국보다 빡세지 않고, 시월드가 존재하지 않고, 애들 사교육비 안들어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외국땅에서 20년 살면서, 그것도 외국생활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던 내가 늙음을 앞두고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니 이민생활은 참으로 에너지가 많이 들어간다 싶다. 일상생활의 매 순간이 에너지 방출이다.
나는 지난 목요일 오후에 있었던 직장내 미팅에서 입을 거의 뻥끗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빠른 속도로 지껄여대는 독일말을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었을 뿐 더러, 질문을 받지도 않았는데 괜히 내 의견을 말했다간 귀찮은 일을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렇게 열정적으로 조사해와서 지껄여대는 젊은 사원이 한편으론 부러웠다.
쟤는 에너지도 참 많지.. 나도 한때는 저렇게 살았지...
그러고 보면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에너지를 방출하며 살았다.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애를 낳고 장사를 하다가 또 직업학교를 다니고 마흔이 넘어서 도시를 바꿔서 아주 다른 분야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에너지가 쏙 빠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의 외국생활 20년은 이렇게 꽉꽉 채워져 에너지 소비가 많았다지만, 내가 혹시 아무 것도 안하고 살림만 하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설사 그렇더라도 한국에서 살림만 하고 산 것보다 에너지 소비가 많았을 것이다. 외국에선 일상생활의 매 순간이 귀기울이고 눈알 굴리고 생각해야하는 시간들로 채워진다. 한국에서는 귀기울이지 않아도 한국말이 술술 들리고 입만 뻥끗해도 한국말이 나오고 별도의 노력을 하지 않아도 한국 글씨들이 술술 읽힌다. 그런데 외국에선 사정이 다르다. 텔레비전 방송, 수퍼마켓에서 점원이 하는 말, 이웃과 나누는 간단한 대화 등 일상생활 속에서 귀로 들어오는 모든 말을 한국말처럼 흘려듣거나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것이 힘들다. 귀기울여 들어야 하고 정신차리고 말해야한다.
기운이 넘칠때는 귀기울여 듣고 정신차리고 말하는 데에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늙으막에 애낳고 키우면서 껍데기만 남아 에너지가 쪽 빠진, 남은 에너지로 일상의 신체 신진대사를 하기에도 벅찬 이 몸뚱아리를 지닌 지금 나는 일상속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외국어에 귀기울여 들을만한 에너지도, 하튼 소리에 일일이 대꾸해줄 에너지도 남아있질 않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면서 라디오를 틀어놓는다. 남편은 건성으로 라디오를 들으며 거기에서 나온 내용을 내게 묻는다.
"미국이 이란 석유수입을 금지하라고 우방국들에게..."
"그런 거 묻지마. 신경끄고 있어서 하나도 못들었어."
남편은 전과 같지 않게 모든 일에 시큰둥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 그는 아이도 낳지 않았고, 외국어로 직장생활을 하지도 않았으며, 모국어로 말하고 듣고 생활하니까. 귀기울여듣고 정신차리고 말해야하고 신문이나 편지, 심지어 광고전단지까지 독해하는 마음으로 접해야하는 이 와중에 음식까지 외국음식을 먹고 살아야하는 나의 고충을 이해할 리가 없지.
이리하여 때때로 나는 신경을 끄고 살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 몸밖으로 흘러나가는 에너지를 잡을 도리가 없다. 이래서 젊어서 독일오신 분들도 나이들면 한국음식만 찾고 한국친구만 찾고 한국방송만 보고, 심지어 아프면 한국으로 가서 병원진찰을 받는다고 하는가 보다.
사람뿐만 아니라 여우조차도 죽을땐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두고 죽는다고 하지 않는가. 수구초심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