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은 제거 대상이 아니라, 삶의 기본값이다

쇼펜하우어와 상담실의 조우

by 안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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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들의 눈동자에는 공통적인 '억울함'이 서려 있습니다. "남들은 다 평온해 보이는데, 왜 유독 내 삶만 이토록 고통스러운가?"라는 질문입니다. 현대 심리학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수많은 치유 기법과 긍정의 서사를 동원합니다. 하지만 20여년 상담 현장을 지키며 제가 목도한 진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때로는 '고통을 없애주겠다'는 성급한 위로가 내담자를 더 깊은 자괴감의 수렁으로 몰아넣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의 기본값

저는 이 지점에서 비관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를 소환하곤 합니다. 그는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끊임없이 흔들리는 추'라고 정의했습니다. 그에게 고통은 삶에서 일어나는 불운한 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이자, 우리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기본값'입니다.

언뜻 냉혹하게 들리는 이 통찰은 역설적이게도 상담실에서 가장 강력한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고통이 '비정상'이 아니라 '필연'이 되는 순간, 내담자는 비로소 자신을 괴롭히던 피해자 서사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잘못해서 아픈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존재의 무게구나"라는 인지는 치유의 패러다임을 '원망'에서 '수용'으로 전환시킵니다.


상담사, 고통을 관조하게 돕는 가이드

상담사는 고통을 없애주는 마술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담자가 마주한 고통의 무게를 철학적 사유로 해석하고, 그 고통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지적 거리'를 확보하도록 돕는 가이드에 가깝습니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극복하라고 조언합니다. 파도를 잠재울 수 없다면, 파도를 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담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대화는 결국, 나를 덮친 파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 위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익히는 과정입니다.


인문학으로 읽고 심리학으로 쓰다

앞으로 이곳 브런치스토리에서 제가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명쾌한 정답이 아닙니다. 20여년의 임상 현장에서 마주한 생생한 사례들을 인문학이라는 여과기에 걸러내어, 그 안에서 길어 올린 삶의 본질적인 통찰들을 기록하려 합니다.

쇼펜하우어의 냉소 뒤에 숨겨진 뜨거운 생의 의지를 찾아내는 과정처럼, 우리의 아픔 뒤에 숨겨진 '살아가야 할 이유'를 함께 탐색해 보려 합니다. 단편적인 위로를 넘어, 당신의 삶을 지탱할 단단한 사유의 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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