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갈 때마다 나는 한 마리 강아지가 되는 것 같았다. 병원에 간 노인의 모습은 비슷했다. 바쁘게 자식들이 뛰어다니고,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거나 가만히 있는 것.
자식과 의사가 나누는 대화는, 강아지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인간들의 대화 같았다. 나를 보며 설명해도 나는 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은 빨리 감기를 한 듯 늘 너무 빨랐다. 내 귀에 가 닿기 전에 다음 이야기가 나오고 또 나오고, 그래서 나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강아지가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나는 강아지처럼 그들의 표정을 살펴 걱정하고, 안도하고. 그래도 좀 괜찮다는 건가, 심각하다는 건가 생각할 뿐이었다.
강아지 꼴이었던 나는 중환자실에 와서는 또 다른 존재가 되었다.
‘튜브 인간’
내 몸이 튜브의 일부가 된 기분이었다. 내 몸에는 간단하게 세어봐도 족히 5개가 넘는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다. 사실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환자라 불리는 인간들은 모두 그랬다.
먼저 얼굴에 두 개의 관이 꽂혀 있다. 코와 입. 코와 입은 숨을 쉬고, 먹고, 말하는 데 쓰인다. 그 기능과 비슷하게 코와 입에 꽂는 관으로 내 몸에 영양분이 들어오고, 숨이 들어왔다. 목 쪽에도 굵직한 것이 꽂혀 있다. 간호사들은 그 관을 통해 주사약을 주입하는 거 같았다. 약물을 주입하기 위해서는 손등에도 관을 꽂는다. 여기에 흔히 말하는 수액이 연결되는 것이다. 몸에 주렁주렁 관을 꽂았으니 나는 화장실에 오가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이다. 그러니 자연히 소변줄을 꽂는다. 관을 통해 소변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중환자실에 있는 모든 이들의 기본 세팅이다. 참 많이도 달고 있다고? 아니, 이건 말한 대로 기본일 뿐이다.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것은 이것 말고도 더 많다. 내가 다 헤아릴 수 없을 뿐이다.
이렇게 관을 꽂았으니 이제 좀 나아지는 걸까? 중환자실로 왔으니 생명은 안전한 걸까?
전혀 그렇지 않다. 중환자실은 가끔 전쟁터처럼 소란해진다. 새로운 환자가 들어오고, 죽은 환자가 나간다. 그런 일은 중환자실에서 흔하다. 그리고 그런 소란이 아니어도 중환자실엔 늘 소음이 있다. 수많은 관을 꽂아 기계에 몸을 맡긴 이들 옆에서 쉬지 않고 기계 소리가 난다. 내게도 그랬다. 식식대는 숨소리처럼 기계음이 멈추지 않고 났다. 그리고 가끔 신경질적인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음은 수액이 다 들어갔다고 알리기도 했고,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고 울리기도 했으며, 누군가의 숨이 끊어졌다고 울리기도 했다. 나는 잠시였을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유일하게 눈을 뜨고 침대에 누워 지내는 사람이었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대부분 눈을 뜨고 있지 않다. 수많은 관을 꽂은 상태는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에 대부분 안정제를 주어 재웠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잠깐잠깐 깨어났고, 숨을 쉬는지 알아보기 위해 안정제를 맞지 못하는 시간이 꽤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다면 중환자실에서 느끼는 끔찍한 고통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고통. 그건 내가 세상에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내 입에는 관이 있다. 관으로 쉬지 않고 숨을 밀어 넣는다. 나는 기계에서 품어내는 공기에 맞춰서 숨을 쉰다. 그러니 입은 항상 벌리고 있어야 한다. 입을 통해 목으로 연결된 관의 느낌은 생각하기 싫을 만큼 끔찍하다. 나는 그것을 빼내고 싶었다. 손으로 푹 빼면 살 것만 같았다. 이 고통이 멎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냥 두지 않았다. 스스로 고통에서 나를 구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뒤척일수록 내 몸을 조이는 힘은 단단해졌다. 양팔이 침대 난간에 묶인 것이다.
더 힘을 짜내보면 손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했다. 아무 소용없었다.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서 다시 한 시도 자유로울 수 없는 고통까지 고통에 고통을 더 할 뿐이었다. 턱은 이미 너무 뻐근해서 저리다 못해 뻣뻣해진 지경이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너무 괴롭고, 아프고, 답답해서. 나는 이 고통을 멈춰야 했다. 혀를 움직여 어떻게든 목에 낀 관을 밀어내보려 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되지 않았다. 나는 눈물이 났다.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서 흐르는 느낌은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불쾌했다. 울지 않아야 그 느낌이라도 덜 수 있었다. 다시 포기하듯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고통은 더 또렷해졌다.
어찌 사람을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나,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면서 나를 살린다고 하는 건가? 이런 곳을 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겐 지옥과 다름없었다. 지옥도 이보다 고통스럽진 않을 것만 같았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하나님은 왜 나를 이곳에 두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벌을 받을 만한 죄를 지은 적이 없는데. 내가 하나님을 따르고, 믿고, 기도한 시간은 진실되고, 영광된 것이었는데. 나는 왜 병원이라는 이름의 지옥에 갇혀 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미쳐버리지. 아니, 죽어버리지. 왜 나는 살려고 이곳에 있는 걸까?
관을 통해 계속 숨이 들어왔지만 나는 숨을 쉬고 싶지 않았다. 숨이 그대로 끊어지기를 원했다. 왜 나를 숨 쉬게 하여 이 고통을 느끼게 하는가? 나에게 고통을 주지 못해서 안달 난 것인가? 나는 의사가 고맙지 않았고, 간호사가 고맙지 않았고,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자식들도 고맙지 않았다. 난 모든 것이 저주스러웠다. 난 정말 죽고 싶었다. 그 순간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죽음뿐이었다. 죽음만이 달콤함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다. 삶에는 날 살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자 님, 이제 숨 쉬는 연습 해볼 거예요. 기계 끄고도 숨쉬기가 잘 되면 관을 뺄 수 있으니까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젊은 간호사가 얼굴 가까이 다가와 설명을 했다. 나는 한 줄기 빛이 비치는구나 했다. 지옥 같은 그곳에서 나를 버티게 하는 건 희망이었다. 나는 관을 뺄 수 있다는 말에 희망을 품었다. 엄혹한 수용소에서도 사람을 살게 하는 건 희망이었다. 나도 그 비슷한 희망을 품은 것이다. 나는 시험장에 들어선 학생처럼 오답을 쓰지 않기 위해 그러니까 스스로 숨 쉴 수 있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목에 걸린 튜브가 말할 수 없이 불편했지만 참으리라 다짐했다.
기계를 끄고 나는 꽤 오랜 시간 잘 버텼다. 잘 버틴 것만 같았다. 간간이 나를 살피러 온 간호사는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 주었다. 나는 계속 그런 칭찬을 들으려 다부진 표정을 하고 그 시간을 버텼다. 잘 버티리라는 다짐을 계속하면서 내 몸이 느끼는 불편함을 잊으려고, 견디려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생각은 몸 안에 갇힌 듯했다. 아무리 강한 마음을 먹어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숨이 가빴다. 점점 심하게 가빠왔다. 기계음이 울리고 간호사들은 안 되겠다며 다시 내 목에, 튜브에 공개를 밀어 넣었다. 기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삽관을 빼기 위한 시도는 그러니까, 실패였다.
희망을 품었던 수용소 사람들이 희망이 이뤄지지 않고 나서는 어떻게 되었더라? 희망이 사라지자 희망을 품지 않았던 사람보다 먼저 죽었다는 거 같았는데. 아, 나는 그 순간 죽었다는 그들이 몹시도 부러웠다. 나는 희망을 품었다가 부품 희망만큼 큰 절망을 느꼈지만 죽지 않았다. 내 몸에 다시 기계가 작동했기 때문이다. 내 몸엔 나의 어떤 의지도 작동하지 않았다. 오직 기계만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